북미정상회담: 지금 북한 여성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
- 김형은
- BBC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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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송월 삼지연관현악단 단장. 김여정, 현송월, 리설주가 달라진 북한 여성상을 대표한다고 봐도 될까?
지금으로부터 1년 전,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 제1부부장이 평창 겨울올림픽 개막식 참석을 위해 한국 땅을 밟았다.
처음으로 북한의 젊은 여성이자 동시에 고위급 관료인 그가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하자, 이목이 집중됐다.
물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여동생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그로부터 몇 주 전 공연 준비를 위해 현송월 삼지연관현악단 단장이 강릉을 방문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당한 태도와 매력적인 외모를 가진 현 단장은 내외신의 많은 관심을 받았다.
오는 27~28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2차 북미정상회담이 열린다. 북한이 만약 베트남처럼 개혁·개방의 길을 걷는다면, 경영 경험이 있는 '장마당 여성'이 중추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는 관측이 있다.
북한의 경우 고난의 행군 시절 어쩔 수 없이 많은 여성이 생계를 책임지게 됐고, 현재 400여 개의 장마당을 주도하고 있는 것 역시 여성이기 때문이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베트남의 경우 여성 노동참가율이 73%로 높고 남성 창업가보다 여성 창업가가 40% 더 많으며, 여성이 국가 부의 40%를 책임지고 있다고 한다.
앞으로 북한의 여성을 더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그렇다면 김여정, 현송월, 리설주와 같은 북한 여성이 달라진 북한 여성상을 보여준다고 봐도 될까? 북한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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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정 노동당 중앙위 제1부부장
'혁명의 한쪽 수레바퀴'
"북한 여성이 따라 배워야 하는 여성 둘이 있다. 바로 김일성의 어머니 강반석과 김정일의 어머니 김정숙이다."
20년 넘게 북한 여성을 연구해 온 임순희 전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최근 BBC 코리아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유는 그들이 북한 여성에게 요구되는 세 가지 역할을 잘 해냈기 때문. "북한 여성이 지켜야 할 덕목은 남편 잘 모시는 것, 아들을 혁명가로 잘 키우는 것, 그리고 자신도 혁명가로서 일을 잘하는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실제 북한에는 '전국어머니대회'라는 것이 있다. 1961년 김일성 주석이 처음으로 열었고, 당시 사회주의 어머니의 역할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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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가족사진
김정일 정권에서도 1998년과 2005년에 두 차례 개최했고 이때 강반석과 김정숙을 '혁명적 여성상'으로 삼았다.
권금상 서울건강가정지원센터장은 '북한여성과 문화연구' 논문에 당시는 '고난의 행군' 시기였기 때문에 대회를 통해 여성들이 국가 고통을 분담하도록 강조했다고 썼다.
김정은도 집권 후 2012년 전국어머니대회를 부활시켰고 어머니의 날을 제정했다.
권 센터장은 김정은 시대 차별점이 있다면 과거에는 국가가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여성을 노동력으로 끌어들이게 하는 데 그쳤다면, 김정은 시대에는 여성을 '주체로 호명한 점'이 눈에 띈다고 썼다.
남녀평등, 북한이 앞섰다?
현재 북한의 인권 문제, 특히 여성 인권 문제가 많이 거론되지만, 사실 역설적이게도 북한 정권 수립 초기에는 가부장적 전통과 봉건사회의 사회질서를 없애려는 노력이 많았다.
김일성은 여성을 '혁명의 한쪽 수레바퀴'로 호명했고 평등한 인간이라는 정체성을 부여했다고 권 센터장은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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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정부 수립 이전인 1946년, 남녀평등을 위한 다양한 법령이 선포됐고 그중 하나는 '북조선 남녀평등에 대한 법령'이다.
이 같은 법 제도를 통해 봉건사회의 첩 제도를 없앴고 토지 개혁으로 몰수한 토지를 여성에게도 무상으로 분배해주었다.
임 연구위원은 "법 제도화는 했다. 법령만 보면 남녀평등 실현됐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아니다"라고 말했다.
"조선시대부터 뿌리 깊었던 남존여비 사상이 지배하고 있다. 한국 여성들은 이를 자각해서 저항했지만 북한 여성들은 자각할 기회가 없었다"고 분석했다.
북한은 유엔회원국으로서 2001년 유엔 '여성차별철폐협약'에도 가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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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자대학교 조영주 교수는 지난해 열린 '여성과 분단체제의 안과 밖' 포럼에서 이를 북한이 자신들은 '정상국가'이고 국제적 규범에 맞게 여성인권을 보장하고 있음을 보이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은 2010년 '조선인민주의인민공화국 녀성권리보장법'을 제정하고 발표했지만, 이는 "실질적인 북한여성의 모습을 비가시화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예쁘게 키워놓은 딸자식'
북한이 봉건주의적인 남녀 질서를 없애고자 했지만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중앙당 5과 대상'이다.
태영호 전 영국주재 북한공사는 지난해 5월 펴낸 '3층 서기실의 암호'에서 이를 조선시대 '궁녀 조직'과도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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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과'는 14~16세 사이의 여학생을 까다롭게 선발해 음악, 예술, 간호, 경호, 통신 등 분야 교육을 시켜 호위사령부나 봉화병원 등에 파견하는 제도다.
외모가 출중하면 김일성 가문의 간호원, 경호원, 전화수, 타자수, 심지어 기쁨조로 일한다.
각종 특혜가 주어지며 20대 중반 퇴직하면 조건 좋은 배우자를 만날 수 있어서 일반 계층 북한 부모들은 딸이 '5과'로 뽑히는 것을 원한다.
하지만 장성택 숙청 사건으로 북한 일반 주민들이 5과 여학생들이 "비밀리에 최고층의 노리개 역할을 하는 내막을 알게 되었다"며 "예쁘게 키워놓은 딸자식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의식이 급속히 퍼지고 있다"고 태 전 공사는 말했다.
'장마당 여성'의 등장
북한에서의 여성의 지위와 인권을 논함에 있어 '장마당'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1995년부터 시작된 극심한 경제난과 식량난으로 국가는 중앙배급제를 중단했고 북한 사람들은 각자 살아남아야 했다.
남성들은 노동에서 이탈 시 처벌되기 때문에 배급이 지급되지 않아도 일터를 지켜야 했고 여성들이 가족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2016년 기준 400여 개에 달한다고 알려진 장마당을 주도하는 것도 여성이다.
현재 베트남 경제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베트남 여성과 북한 여성이 가진 공통점이다.
사진 출처, 조선익스체인지
조선익스체인지는 여성 사업가를 위한 프로그램을 별도로 운영해왔다
베트남 출신으로 하버드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밴 트랜은 BBC 코리아에 북한 여성과 베트남 여성은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다. 그들이 일하게 된 동기다. 하지만 이들은 동시에 가부장적 사회의 편견과 자원 부족과 맞서 싸워야 한다"고 말했다.
트랜은 싱가포르와 베트남에 지사를 둔 대북 교류단체인 조선익스체인지(Choson Exchange)에서 자원봉사자로 북한 여성 경영인과 창업가를 싱가포르와, 베트남 그리고 평양에서 지도한 바 있다.
흔히 경제력을 쥐고 있으면 권력이 생길 것으로 생각하지만 장마당과 북한 여성 지위와 인권에 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김성경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에서 발간되는 '한반도 포커스'에 게재한 논문에서 북한 여성이 주요 경제주체가 되어 "결혼 시기를 조금씩 늦추거나 경제적으로 안정된 배우자를 선호하고 좀 더 평등한 가사분담을 요구하는 등 기존의 가부장제 가치관에 조금씩 균열을 만들어가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사진 출처, 평양사진공동취재단
평양 시내
결혼을 안 하거나 이혼하는 풍조도 생겼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실제로 장마당에서 음식을 위주로 장사하다 2010년에 탈북한 50대 초반 강미진 씨는 BBC 코리아에 "여성이 좀 더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다"며 "여성들이 수십 년간 경제권을 갖고 살아왔기 때문에 경영에 대해서는 남성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한다. 향후 북한 경제를 움직이는 중추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과정은 옳지 않다'
지난해 11월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HRW)는 북한 내 성폭력 실상에 대한 보고서를 발표하며, 특히 장마당에서 일하는 여성들이 성폭력에 쉽게 노출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북한에서 관리로 일했던 8명의 탈북민을 포함해 54명의 탈북민을 인터뷰한 "이유 없이 밤에 눈물이 나요: 북한의 성폭력 실상"이라는 보고서에는 북한의 계획경제 아래에 장사는 불법이기 때문에 장사하는 여성들이 관리와 간부들에게 뇌물 주는 것이 만연하다고 나와있다. '뇌물'에는 성행위도 포함한다.
사진 출처, 휴먼라이츠워치 제공
탈북 웹툰작가 최성국 씨가 그린 장마당 모습
조영주 교수도 "시장을 관리하는 이들은 주로 남성이며 출신성분이나 집안 배경이 좋은 이들"이라는 점을 짚으며 "기존 북한 사회의 젠더 질서를 균열시키는 데 제약을 주는 측면도 있다"고 설명했다.
임순희 전 연구위원 역시 부정적인 영향에 주목했다. "장사를 하려면 지역을 이동해야 하는데 북한에는 지역 이동의 자유가 없다. 여성들은 뭔가 스스로 꾀를 내야 했다. 뇌물도 바치고 나아가 성 상납도 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이어 장마당을 통해 여성들의 목소리가 더 높아졌을지는 몰라도 "바람직하지 못한 과정을 겪었다"고 강조했다. "자본주의를 이론으로 배우지도 못했고 장사를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둘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어쩔 수 없이 뇌물 많이 활용했고 성폭력 시달렸다"고 말했다.
하지만 강 씨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장마당이 여성을 더 위험에 노출시켰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뭐가 없을 때는 성적 능욕도 당할 수 있지만 돈이 있어서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반박했다.
가정파괴와 탈북
여성이 시장 활동을 하면서 뜻하지 않게 초래한 또 다른 사회 현상은 '가정 파괴'와 '탈북'이다.
장사를 위해 북한 여성은 중국도 오가게 됐다. 개혁·개방된 중국에서 자신들이 알던 것과 다른 세계를 접하게 된 것이다.
사진 출처, 뉴스1
리설주 여사가 김정은 위원장의 서류 가방과 안경으로 보이는 것을 들고 있다
임 연구위원은 "시장 활동을 하는 여성들은 사회를 보는 눈, 남성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 이 경우 남편들이 여성을 인정하는 경우도 있지만 오히려 가정폭력이 심해진 경우도 있다. 이혼도 하게 됐다"고 말했다.
또 다른 경우 돈을 벌기 위해 자진해 중국에 시집을 가거나 브로커를 통해 인신매매를 당하기도 했다.
BBC 코리아가 최근 인터뷰한 '마담B'(가명)가 이 같은 사례다. 2003년 그는 북한 회령을 떠나 국경을 넘었다.
중국에서 1년 동안 노인들 '보모'를 하면 80만원을 번다는 얘기를 조선족 브로커로부터 들은 후였다.
그는 이것이 북한의 남편과 아들 둘을 먹여 살리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중국 남성에게 팔려갔지만 10년간 그와 살면서 그에게 '정'이 생겼고, 윤재호 감독의 다큐멘터리 '마담B'는 이 아이러니에 중점을 뒀다.
사진 출처, 씨네소파 영화배급협동조합
마담B는 자신이 탈북하기 전 중국에서 브로커로 활동하며 50여 명을 한국으로 보내는 일을 했다
북한 여성은 중국을 오가다 중국에 안착하는 경우도 있지만 탈북하는 경우도 많다.
2017년 12월 기준 탈북자 중 여성은 72%를 차지했다. 매해 탈북자 중 여성은 70~80%를 유지한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한편, 한 연구는 북한 이탈 여성의 이미지가 한국 결혼시장에서 심각하게 왜곡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통일연구원 김수경 부연구위원은 결혼정보업체들의 웹사이트를 분석해 지난해 '결혼시장에서 북한 이탈 여성의 이미지 재현 연구' 보고서를 냈다.
사진 출처, KIM JAE-HWAN
안성 하나원에서 공중전화를 쓰는 탈북민들
그는 업체들이 탈북 여성이 "가부장제에 순종적인데 정작 자유를 위해서는 목숨을 걸 만큼 용맹하다"는 이미지를 강조한다고 말했다.
'남편을 하늘처럼 모신다' '마음이 따뜻하고 내조를 잘한다' '북한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절대 가족을 포기하지 않아서 이혼율도 낮다' 등의 홍보 문구로 수동적, 의존적, 순종적인 존재로 묘사된다는 것이다.
한편 탈북자 강 씨는 김여정, 현송월, 리설주는 북한 여성상을 대표한다고 보기 힘들다고 한다.
그는 "동일시하면 안 된다. 권한이 엄연히 다르다"며 "하지만 리설주가 등장 이후 공공장소에서 남편과의 애정 표현과 자신을 꾸미는 것에 있어서 자유로워진 부분은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