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구역 

아프가니스탄 최대 교도소 안
탈레반 구역 

BBC가 어렵게 풀에차르키를 취재했다.
이곳에는 2천명의 탈레반이 수감돼 있다.
지하드는 누구인가?
그들이 생각하는 아프간의 미래는 무엇인가?
 

BBC가 어렵게
풀에차르키를 취재했다.

이곳에는 2천명의 탈레반이
수감돼 있다.

지하드는 누구인가?

그들이 생각하는
아프가니스탄의 미래는 무엇일까?

풀에차르키
교도소

카불

경고: 기사 중 일부 독자를 불편하게 하는 표현이 있음을 밝혀둔다.

아프간의 수도 카불 외곽의 풀에차르키(Pul-e-Charkhi)는 회색의 거대한 석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여러 개의 감시탑과 거대한 철문이 있는 석벽 위에는 가시 돋친 철조망이 둘러 쳐 있다. 1만여 명의 수감자 중 5분의 1은 아프간의 엄격한 분리주의 이슬람 단체, 탈레반이다.

탈레반 수감자 모와위 파젤 바리는 자신이 타고난 전사는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교도소에서 지낸 지 5년 만에 이보다 더 죽을 준비가 된 적은 없다고 했다.  

“너무나 절망스럽다. 내가 자살 폭탄 조끼를 입으리라고 상상도 못했지만, 이제 신에게 맹세한다. 나는 할 것이다.”

당분간 바리는 보안 등급 최고 수위의 교도소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특별 사면으로 탈레반 수용자들을 석방시킨 아프간의 교도소 중 한 곳이다. 평화 회담이 중단되자 정부가 취한 친선의 제스처였다.

탈레반의 장기적인 목적은 아프간에 이슬람 국가를 재건하는 것이다. 1996년부터 2001년간 정권을 잡았을 당시 샤리아, 즉 이슬람 율법과 강력한 정권을 도입해, 공적 생활에서 여성을 배제했고, 돌팔매질과 신체 절단 같은 형벌을 시행했다. 향후 탈레반 정권이 어떤 식으로 운영될 지는 미지수다.

2001년, 미국 주도 연합군이 탈레반 정권을 무너뜨린 후 아프간에서는 수만 명의 민간인을 포함,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죽었다.

탈레반 수감자들은 BBC에 자신들의 동기와 불만을 거침없이 토로했지만, 어떤 활동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기를 주저했다. 하지만 우리는 모와위 파젤 바리가 15년 전 탈레반에 가담했고, 아프간과 연합군이 전투를 벌인 헬만드 주에서 탈레반을 이끌던 사령관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바리의 비좁은 감방은 남자들로 가득 차있고, 모두 탈레반원이다. 복도에는 줄을 서있었다. 일부는 출입구에 쭈그려 앉아있고 일부는 높은 3층 침대에서 내려다 보고 있다. 나이 들어 보이는 한 수감자는 바닥에 앉아 긴 구슬을 돌리며 조용히 기도문을 외우고 있다.

바닥에는 붉은 색 카페트와 쿠션이 깔려있고, 사방의 벽은 무슬림의 성지 메카와 메디나의 모습을 묘사한 포스터들과 함께, 흔히 생각하는 이상적인 이미지, 즉 꽃다발, 폭포, 심지어 아이스크림 사진들로 모자이크 되어있다. 

수감자들은 낙원을 떠올리게 하는 이미지로 감방을 꾸몄는데, 작전 중에 죽으면 천국으로 간다는 이들의 근본주의 믿음이 반영됐다. 

벽 옆에는 코란과 이슬람 문학에 관한 두툼한 책들이 높이 쌓여있다.

바리가 설교를 시작하자 모든 눈이 그에게로 쏠렸다. 그는 전에 이슬람 학자였고 그 자체만으로 동료 수감자들은 그를 높이 평가한다.

“여러분에게 말하지만” 바리가 말했다. “아프간에 외국 군대가 있는 한 평화는 불가능하다.”

An inmate lies back in his bunk bed decorated by red drapes and a large poster of Medina

2001년 9월 미국에서 테러를 일으킨 알 카에다와 오사마 빈 라덴을 숨겨줬다는 이유로 아프간의 탈레반은 고발당했다. 19년째 아프간에서 계속되고 있는 탈레반과 미국 주도 연합군 간의 전쟁은 미국 역사 상 가장 긴 싸움이다.

지난 9월,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탈레반과 평화 조약을 맺는 듯 했다. 그러나 탈레반이 미군을 포함해 12명의 사망자를 낸 카불폭탄 테러에 책임이 있다고 인정하자 갑작스레 평화 회담을 취소했다.

미국에 따르면 아프간에 최고 1만3천여개의 군부대가 주둔해 있다. 회담이 깨어져 무산된 탈레반과의 조약 초안에는 서명 후 다섯 달 안에 8천6백개 규모로 축소하기로 되어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2016년 대통령 선거에서 아프간에서 탈레반과의 전쟁을 끝내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많은 비평가들은 아프간 정부의동의없이 군을 철수시킬 경우 나라가 혼란에 빠질 것이라 예상한다. 현재까지의 평화 회담에 아프간 정부는 참여하지 않았다.

주의: 기사 중 일부 독자를 불편하게 하는 표현이 있음을 밝혀둔다.

아프간의 수도 카불 외곽의 풀에차르키(Pul-e-Charkhi)는 회색의 거대한 석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여러 개의 감시탑과 거대한 철문이  있는 석벽 위에는 가시 돋친 철조망이 둘러 쳐 있다. 1만여 명의 수감자 중 5분의 1은 아프간의 엄격한 분리주의 이슬람 단체, 탈레반이다. 

An elderly Talib holding his prayer beads

탈레반 수감자 모와위 파젤 바리는 자신이 타고난 전사는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교도소에서 지낸 지 5년 만에 이보다 더 죽을 준비가 된적은 없다고 했다.

“너무나 절망스럽다. 내가 자살 폭탄 조끼를 입으리라고 상상도 못했지만, 이제 신에게 맹세한다. 나는 할 것이다.”

당분간 바리는 보안 등급 최고 수위의 교도소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곳은 특별 사면으로 탈레반 수용자들을 석방시킨 아프간의 교도소 중 한 곳이다. 평화 회담이 중단되자 정부가 취한 친선의 제스처였다. 

탈레반의 장기적인 목적은 아프간에 이슬람 국가를 재건하는 것이다. 1996년부터 2001년간 정권을 잡았을 당시 샤리아, 즉 이슬람 율법과 강력한 정권을 도입해, 공적 생활에서 여성을 배제했고, 돌팔매질과 신체 절단 같은 형벌을 시행했다. 향후 탈레반 정권이 어떤 식으로 운영될 지는 미지수다.

2001년, 미국 주도 연합군이 탈레반 정권을 무너뜨린 후 아프간에서는 수만 명의 민간인을 포함,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죽었다.

탈레반 수감자들은 BBC에 자신들의 동기와 불만을 거침없이 토로했지만, 어떤 활동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기를 주저했다. 하지만우리는 모와위 파젤 바리가 15년 전 탈레반에 가담했고, 아프간과 연합군이 전투를 벌인 헬만드 주에서 탈레반을 이끌던 사령관이라는사실을 알게 됐다.

바리의 비좁은 감방은 남자들로 가득 차있고, 모두 탈레반원이다. 복도에는 줄을 서있었다. 일부는 출입구에 쭈그려 앉아있고 일부는 높은 3층 침대에서 내려다 보고 있다. 나이 들어 보이는 한 수감자는 바닥에 앉아 긴 구슬을 돌리며 조용히 기도문을 외우고 있다.

An inmate lies back in his bunk bed decorated by red drapes and a large poster of Medina

바닥에는 붉은 색 카페트와 쿠션이 깔려있고, 사방의 벽은 무슬림의 성지 메카와 메디나의 모습을 묘사한 포스터들과 함께, 흔히 생각하는 이상적인 이미지, 즉 꽃다발, 폭포, 심지어 아이스크림 사진들로 모자이크 되어있다.  

수감자들은 낙원을 떠올리게 하는 이미지로 감방을 꾸몄는데, 작전 중에 죽으면 천국으로 간다는 이들의 근본주의 믿음이 반영됐다.   

N벽 옆에는 코란과 이슬람 문학에 관한 두툼한 책들이 높이 쌓여있다.

바리가 설교를 시작하자 모든 눈이 그에게로 쏠렸다. 그는 전에 이슬람 학자였고 그 자체만으로 동료 수감자들은 그를 높이 평가한다.

“여러분에게 말하지만” 바리가 말했다. “아프간에 외국 군대가 있는 한 평화는 불가능하다.”

A Talib inmate clasping a cup of green tea listens intently to his elders

2001년 9월 미국에서 테러를 일으킨 알 카에다와 오사마 빈 라덴을 숨겨줬다는 이유로 아프간의 탈레반은 고발당했다. 19년째 아프간에서 계속되고 있는 탈레반과 미국 주도 연합군 간의 전쟁은 미국 역사 상 가장 긴 싸움이다.

지난 9월,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탈레반과 평화 조약을 맺는 듯 했다. 그러나 탈레반이 미군을 포함해 12명의 사망자를 낸 카불폭탄 테러에 책임이 있다고 인정하자 갑작스레 평화 회담을 취소했다.  

미국에 따르면 아프간에 최고 1만3천여개의 군부대가 주둔해 있다. 회담이 깨어져 무산된 탈레반과의 조약 초안에는 서명 후 다섯 달 안에 8천6백개 규모로 축소하기로 되어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2016년 대통령 선거에서 아프간에서 탈레반과의 전쟁을 끝내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많은 비평가들은 아프간 정부의 동의없이 군을 철수시킬 경우 나라가 혼란에 빠질 것이라 예상한다. 현재까지의 평화 회담에 아프간 정부는 참여하지 않았다.

제 6구역에 들어가는 것은 마치 탈레반 영토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긴 복도를 가득 메운 탈레반 수감자들은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면도,목욕, 요리를 한다.

바리의 수감동료들은 아프간의 다양한 삶을 보여준다. 교사, 농부, 상인, 운전기사였던 이들은 탈레반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세금을 징수하고, 행동대원으로 순찰을 돌고, 폭탄을 설치하는 등 다양한 죄목이다.

바리와 같은 연장자는 교도소의 일정을 조율하고, 기도와 이슬람 율법 공부 시간을 통해 수감자를 이끌어 간다. 일출부터 일몰까지 하루다섯 번 기도와 코란을 암송하는 비정기적인 공부시간이 있다. 식사 시간과 수감자들의 외부 활동 시간에는 정치 이슈가 대화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대다수는 복수를 위해 탈레반에 가입했으며, 공습에 앙갚음을 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15년 전) 미군이 내가 살던 마을을 공습해 이웃과 그의 두 부인이 죽었다.  막내 아들 라마툴라만 살아남았다.” 바리가 말했다.

“그를 입양해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러나 헬리콥터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는 ‘나를 죽이러 와요’라고 비명을 지르며 달려왔다.”

‘수많은 이슬람 사원이 파괴되고 여자와 어린이들이 죽는 것’을 본 후 그는 참전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교도소 내 또다른 탈레반 연장자 물라 술탄에 따르면 그는 자신이 본 ‘잔학함’에 맞서고 싶었다. “아프간 사람으로 내 목소리를 내고, 나는 이런 침입자들을 허용한 적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내 권리라고 생각한다.”고 그는 말했다.

A corridor in block 6 of the Taliban wing

십여 년간 미군이 이끄는 연합군이 점진적으로 철수하자 이를 상쇄하기 위해 공습이 증가했다. 그러나 부정확한 공습이 자주 발생하면서민간인의 희생이 뒤따랐다.

유엔의 발표에 따르면 2019년 상반기, 탈레반 무장세력보다 미군이 이끄는 아프간 연합군에 사망한 민간인이 더 많다.

그러나 탈레반을 포함한 분리주의자들은 지난 십여 년간 사망한 대부분의 민간인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고 유엔은 밝혔다.

탈레반 수감자들이 말한 것처럼, 전쟁터에서 자란 젊은 남성들이 탈레반에 가담할 동기를 갖게 되듯, 교도소에 있으면서 그들의 슬픔은 더욱 격렬해지는 것처럼 보였다.  

바리와 같은 지도자는 그의 전임자, 심지어 탈레반의 최고 지도자 셰이크 히바 툴라 아쿤 자다로부터 설교를 전수받았고, 자신의 배움을 수감자들에게 직접 전달한다고들 믿는다.  

한참 평화 회담이 진행 중일 때 관련 소식 또한 공유됐다.

A Talib behind bars in block six

“외국인들이 지칠 줄 알았다.”고 물라 술탄은 말했다.

“그들이 무릎을 꿇고 돌아갈 것임을 우리는 안다. 우리 아프간 사람들은 이슬람 율법 샤리아와 이슬람 제도 아래서 영원히 함께 살 것이다.”고 그가 말했다.

제 6구역에 들어가는 것은 마치 탈레반 영토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긴 복도를 가득 메운 탈레반 수감자들은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면도,목욕, 요리를 한다.

바리의 수감동료들은 아프간의 다양한 삶을 보여준다. 교사, 농부, 상인, 운전기사였던 이들은 탈레반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세금을 징수하고, 행동대원으로 순찰을 돌고, 폭탄을 설치하는 등 다양한 죄목이다.

바리와 같은 연장자는 교도소의 일정을 조율하고, 기도와 이슬람 율법 공부 시간을 통해 수감자를 이끌어 간다.

일출부터 일몰까지 하루 다섯 번 기도와 코란을 암송하는 비정기적인 공부시간이 있다. 식사 시간과 수감자들의 외부 활동 시간에는 정치 이슈가 대화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대다수는 복수를 위해 탈레반에 가입했으며, 공습에 앙갚음을 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15년 전) 미군이 내가 살던 마을을 공습해 이웃과 그의 두 부인이 죽었다.  막내 아들 라마툴라만 살아남았다.” 바리가 말했다.

“그를 입양해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러나 헬리콥터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는 ‘나를 죽이러 와요’라고 비명을 지르며 달려왔다.”

‘수많은 이슬람 사원이 파괴되고 여자와 어린이들이 죽는 것’을 본 후 그는 참전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교도소 내 또다른 탈레반 연장자 물라 술탄에 따르면 그는 자신이 본 ‘잔학함’에 맞서고 싶었다. “아프간 사람으로 내 목소리를 내고 나는이런 침입자들을 허용한 적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내 권리라고 생각한다.”고 그는 말했다.

십여 년간 미군이 이끄는 연합군이 점진적으로 철수하자 이를 상쇄하기 위해 공습이 증가했다. 그러나 부정확한 공습이 자주 발생하면서 민간인의 희생이 뒤따랐다.

유엔의 발표에 따르면 2019년 상반기, 탈레반 무장세력보다 미군이 이끄는 아프간 연합군에 사망한 민간인이 더 많다.

그러나 탈레반을 포함한 분리주의자들은 지난 십여 년간 사망한 대부분의 민간인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고 유엔은 밝혔다.

탈레반 수감자들이 말한 것처럼, 전쟁터에서 자란 젊은 남성들이 탈레반에 가담할 동기를 갖게 되듯, 교도소에 있으면서 그들의 슬픔은 더욱 격렬해지는 것처럼 보였다.  

바리와 같은 지도자는 그의 전임자, 심지어 탈레반의 최고 지도자 셰이크 히바 툴라 아쿤 자다로부터 설교를 전수받았고,  자신의 배움을 수감자들에게 직접 전달한다고들 믿는다.  

한참 평화 회담이 진행 중일 때 관련 소식 또한 공유됐다.

“외국인들이 지칠 줄 알았다.”고 물라 술탄은 말했다.

“그들이 무릎을 꿇고 돌아갈 것임을 우리는 안다. 우리 아프간 사람들은 이슬람 율법 샤리아와 이슬람 제도 아래서 영원히 함께 살 것이다.”고 그가 말했다.

Taliban elders Mullah Sultan (L) and Mawlawi Fazel Bari (R) in the prison guard's office

탈레반 수감자 물라 술탄(좌)과 모와위 파젤 바리(우)

탈레반 수감자 물라 술탄(좌)과 모와위 파젤 바리(우)

탈레반 수감자들은 일정을 스스로 결정하고, 수감자들을 위한 종교 학교를 여는 것은 물론, 의료 혜택이나 법적 자문을 받는 등 다른 수감자들보다 더 많은 특권을 누리는 것을 즐기는 듯 했다.

탈레반 특유의 단결과 명확한 명령 체계는 교도소 안에서 더 많은 영향력을 발휘하는 듯 하다. 그 결과 더 나은 조건을 얻기 위한 막후교섭을 할 때 풀에차르키 전체를 대표하기도 한다. 교도관들은 이들이 연합 전선을 제시한다는 것을 안다. 마치 탈레반의 또다른 연장자 수감자  말라위 마무르가 ‘우리는 서로의 권리를 지켜주기 위해 죽을 수 있다’고 말했던 것처럼 말이다.

교도관들에 따르면 그들과 탈레반 수감자들은 협업 관계다.

“우리와 탈레반 수감자 지도자들 간의 협업 정신은 매우 끈끈하다.”고 제 6구역의 지휘를 맡은 28세의 교도관 라무딘은 말했다.

“한번에 2천명 가량의 수감자가 수용된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저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러나 탈레반 수감자들이 교도소 환경 개선을 요구하는 시위를 정기적으로 하는 것을 보면 이들의 관계가 항상 상호보완적인 것 같지는 않다.

수감자들은 BBC와의 인터뷰에서 입술을 실로 꿰매거나 자전거 살로 입을 막는 단식 투쟁을 자주 한다고 말했다. 부족한 의료 혜택, 지연되는 사법절차, 간수들의 잘못된 행동 등 교도소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서다.

탈레반 수감자들이 간수들을 공격하고, 때로는 교도소의 일부분을 통제한다는 보고도 있었다.

BBC는 진위를 확인하고자 내무부와 접촉했으나 아무런 답을 듣지 못했다. 그러나 BBC는 몇 달 간격으로 투쟁 중인 사진과 도움을 요청하는 탄원의 전화와 편지를 받고 있다.

올해 초 수감자와 간수 간 충돌로 4명의 수감자가 사망하고 20명의 경찰을 포함해 33명이 다쳤다. 확인되지 않은 보고에 따르면 당시 수감자들은 의료 시설 부족에 항의하는 시위 중이었다. 그러나 내무부의 대변인은  BBC에 당시 충돌은 마약 소지 수색 후 발생했으며 교도소 내 마약 거래자가 선동했다고 말했다.

Pul-e-Charkhi prison from above

풀에차르키 교도소 부감도

풀에차르키 교도소 부감도

이와 같은 폭력적인 상황에서 수 년을 살게 되면 수감자들의 태도는 더욱 거칠어 진다.

이중 일부는 석방되었거나 석방되게 될 것이다. 지난 6월 아프간 대통령  아슈라프 가니는 887명의 탈레반 수감자를 풀에차르키 및 다른 교도소에서 석방했다. 

이슬람의 대 명절 에이드에 십 여명의 죄수를 특별사면하는 것은 관례다. 그러나 이번 특사는 미국과 탈레반과의 평화 회담에서 배제된 정부가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쇼라는 평가다.

탈레반은 아프간 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할 수 없다며 직접 협상을 거절했다.

바리는 앞으로 2년 간 더 복역해야 한다. 그는 자신이 자유의 몸이 되면 성전, 즉 지하드를 계속할 것이라고 단호히 밝혔다.

“이곳에서 풀려나면 내 부대로 복귀할 것이다. 조국을 수호하기 위한 성스러운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책임감이 과거에는 20퍼센트였라면 지금은 100퍼센트다.”

대통령 특별 사면으로 석방이 된 그의 친구이자 전 수감 동료 카리 시드 모하메드는 현재 탈레반 영토의 집으로 돌아갔다.  

Three Taliban elders walk around the prison perimeter

탈레반 수감자 물라 술탄(왼쪽)과 모와위 파젤 바리(오른쪽)

탈레반 수감자 물라 술탄(왼쪽)과 모와위 파젤 바리(오른쪽)

탈레반 수감자들은 일정을 스스로 결정하고, 수감자들을 위한 종교 학교를 여는 것은 물론, 의료 혜택이나 법적 자문을 받는 등 다른 수감자들보다 더 많은 특권을 누리는 것을 즐기는 듯 했다.

탈레반 특유의 단결과 명확한 명령 체계는 교도소 안에서 더 많은 영향력을 발휘하는 듯 하다. 그 결과 더 나은 조건을 얻기 위한 막후교섭을 할 때 풀에차르키 전체를 대표하기도 한다. 교도관들은 이들이 연합 전선을 제시한다는 것을 안다. 마치 탈레반의 또다른 연장자 수감자  말라위 마무르가 ‘우리는 서로의 권리를 지켜주기 위해 죽을 수 있다’고 말했던 것처럼 말이다.

교도관들에 따르면 그들과 탈레반 수감자들은 협업 관계다.

“우리와 탈레반 수감자 지도자들 간의 협업 정신은 매우 끈끈하다.”고 제 6구역의 지휘를 맡은 28세의 교도관 라무딘은 말했다.

“한번에 2천명 가량의 수감자가 수용된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저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러나 탈레반 수감자들이 교도소 환경 개선을 요구하는 시위를 정기적으로 하는 것을 보면 이들의 관계가 항상 상호보완적인 것 같지는 않다.

수감자들은 BBC와의 인터뷰에서 입술을 실로 꿰매거나 자전거 살로 입을 막는 단식 투쟁을 자주 한다고 말했다. 부족한 의료 혜택, 지연되는 사법절차, 간수들의 잘못된 행동 등 교도소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서다.

탈레반 수감자들이 간수들을 공격하고, 때로는 교도소의 일부분을 통제한다는 보고도 있었다.

BBC는 진위를 확인하고자 내무부와 접촉했으나 아무런 답을 듣지 못했다. 그러나 BBC는 몇 달 간격으로 투쟁 중인 사진과 도움을 요청하는 탄원의 전화와 편지를 받고 있다.

올해 초 수감자와 간수 간 충돌로 4명의 수감자가 사망하고 20명의 경찰을 포함해 33명이 다쳤다. 확인되지 않은 보고에 따르면 당시 수감자들은 의료 시설 부족에 항의하는 시위 중이었다. 그러나 내무부의 대변인은  BBC에 당시 충돌은 마약 소지 수색 후 발생했으며 교도소 내 마약 거래자가 선동했다고 말했다.

이와 같은 폭력적인 상황에서 수 년을 살게 되면 수감자들의 태도는 더욱 거칠어 진다.

이중 일부는 석방되었거나 석방되게 될 것이다. 지난 6월 아프간 대통령  아슈라프 가니는 887명의 탈레반 수감자를 풀에차르키 및 다른 교도소에서 석방했다. 이슬람의 대 명절 에이드에 십 여명의 죄수를 특별사면하는 것은 관례다. 그러나 이번 특사는 미국과 탈레반과의 평화 회담에서 배제된 정부가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쇼라는 평가다.

탈레반은 아프간 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할 수 없다며 직접 협상을 거절했다.

바리는 앞으로 2년 간 더 복역해야 한다. 그는 자신이 자유의 몸이 되면 성전, 즉 지하드를 계속할 것이라고 단호히 밝혔다.

“이곳에서 풀려나면 내 부대로 복귀할 것이다. 조국을 수호하기 위한 성스러운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책임감이 과거에는 20퍼센트였라면 지금은 100퍼센트다.”

대통령 특별 사면으로 석방이 된 그의 친구이자 전 수감 동료 카리 시드 모하메드는 현재 탈레반 영토의 집으로 돌아갔다.  

탈레반 영토

발크

아프가니스탄 북부

32살의 카리 시드 모하메드는 아프간 북부의 발크 주에 산다. 풀에차르키 교도소에서 6년을 보낸 후 탈레반 영토 깊은 곳으로 돌아왔다.

그는 현재 집안의 유일한 남성으로(그가 복역 중 아버지와 두 형제는 사망했다), 지금은 가족 소유의 농장을 돌보기 위해 집에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최근에 석방된 수감자들 가운데 자신이 살아남은 몇 안되는 경우일 것이라고 말했다.

“석방자 중 95퍼센트는 탈레반에 다시 가담했고 많은 수가 이미 사망했다.” 집으로 돌아온 지 불과 20일이 지났지만 말이다.

모하메드는  18살 때 열 다섯 명의 친구들과 함께 탈레반에 가입했다. 경찰의 가혹행위에서 탈출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가혹행위는 시골 마을의 일부분이었다. 누군가 경찰에게 우리에 대해 거짓말을 하면 경찰은 우리를 벌 주러 왔다. 그래서 어차피 경찰이 우리를 잡으러 올 거라면 우리 손으로 운명을 결정하자라고 생각했다.”

전국적인 아프간 경찰 내 폭력과 부패 문제는 여러 인권 단체들을 통해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젊은 아프간 남성이 탈레반에 가담하는 이유는 좀더 복잡하다. 무차별 총결과 포격, 실업, 나중에 팔 수 있는 차량과 탄약, 무기 등 전쟁 전리품에 대한 욕심, 또래 간 압박 등으로 인한 행동이다.

모하메드가 탈레반이 된 후 맡은 첫번째 임무는 세금 징수였다. 여섯 명 가량의 성인 남성이 한 조를 이뤄 오토바이를 타고 네 개 지역에 퍼져있는 아편 농장을 방문해 수금했다. 탈레반 영토에서 아편 재배는 합법이다.  

행동 대원으로서 그는 명확한 명령 체계를 따랐다. 지역의 지사로부터 시작되어 군사령관, 부사령관, 몇 명의 현장 중위로 이어졌다. 모하메드에 따르면 정해진 연봉은 따로 없었으나 탄약부터 연료, 전화 요금에 이르기까지 모든 지출을 청구할 수 있었다.

3년 정도 흐르자 전국적에서 심각해진 전쟁으로 동기가 부여됐다. 모든 외국 병력을 향한 성스러운 전쟁 또는 탈레반의 지하드를 그는 온 몸으로 받아들였다.

“21살 때 어깨에 총을 올렸다. 무슬림을 방어하기 위해 이교도와 전쟁에 참여한다고 생각했던 것을 기억한다. 나는 줄곧 그렇게 생각해왔고 끝까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Two of Qari Sayed Muhammed's four daughters play on a homemade swing

지하드의 이념에 따라 그는 자신의 생명이 위험할 때마다 자신이 죽게 되면 종교적 임무를 완수하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가족에 대한 걱정을 떨쳤다고 말했다.

그의 부대가 평지에 있던 한 마을에서 습격 당해, 러시아 제 기관총이 그를 향해 사격하던 일을 설명했다.

“머리가 정말 빠르게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내 가족에게는 어떤 일이 생길까? 내 아이는? 내 아내는? 자신의 가족에 대한 생각으로 악마가 정신을 빼놓으려는 순간이다. 그러나 나는 알라를 위해 일하고 있다는 사실에 집중하려고 했다.”

2013년 모하메드는 아프간 정보 기관에 잡혀 풀에차르키 교도소로 보내졌다.

탈레반에 가입하기 위해 함께 마을을 떠났던 열 다섯 명의 친구 중 두 명만이 살아있다.

32살의 카리 시드 모하메드는 아프간 북부의 발크 주에 산다. 풀에차르키 교도소에서 6년을 보낸 후 탈레반 영토 깊은 곳으로 돌아왔다.

그는 현재 집안의 유일한 남성으로(그가 복역 중 아버지와 두 형제는 사망했다), 지금은 가족 소유의 농장을 돌보기 위해 집에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최근에 석방된 수감자들 가운데 자신이 살아남은 몇 안되는 경우일 것이라고 말했다.

“석방자 중 95퍼센트는 탈레반에 다시 가담했고 많은 수가 이미 사망했다.” 집으로 돌아온 지 불과 20일이 지났지만 말이다.

모하메드는  18살 때 열 다섯 명의 친구들과 함께 탈레반에 가입했다. 경찰의 가혹행위에서 탈출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가혹행위는 시골 마을의 일부분이었다. 누군가 경찰에게 우리에 대해 거짓말을 하면 경찰은 우리를 벌 주러 왔다. 그래서 어차피 경찰이 우리를 잡으러 올 거라면 우리 손으로 운명을 결정하자라고  생각했다.”

전국적인 아프간 경찰 내 폭력과 부패 문제는 여러 인권 단체들을 통해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젊은 아프간 남성이 탈레반에 가담하는 이유는 좀더 복잡하다. 무차별 총결과 포격, 실업, 나중에 팔 수 있는 차량과 탄약, 무기 등 전쟁 전리품에 대한 욕심, 또래 간 압박 등으로 인한 행동이다.

모하메드가 탈레반이 된 후 맡은 첫번째 임무는 세금 징수였다. 여섯 명 가량의 성인 남성이 한 조를 이뤄 오토바이를 타고 네 개 지역에 퍼져있는 아편 농장을 방문해 수금했다. 탈레반 영토에서 아편 재배는 합법이다.  

행동 대원으로서 그는 명확한 명령 체계를 따랐다. 지역의 지사로부터 시작되어 군사령관, 부사령관, 몇 명의 현장 중위로 이어졌다. 모하메드에 따르면 정해진 연봉은 따로 없었으나 탄약부터 연료, 전화 요금에 이르기까지 모든 지출을 청구할 수 있었다.

3년 정도 흐르자 전국적에서 심각해진 전쟁으로 동기가 부여됐다. 모든 외국 병력을 향한 성스러운 전쟁 또는 탈레반의 지하드를 그는 온 몸으로 받아들였다.

“21살 때 어깨에 총을 올렸다. 무슬림을 방어하기 위해 이교도와 전쟁에 참여한다고 생각했던 것을 기억한다. 나는 줄곧 그렇게 생각해왔고 끝까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지하드의 이념에 따라 그는 자신의 생명이 위험할 때마다 자신이 죽게 되면 종교적 임무를 완수하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가족에 대한 걱정을 떨쳤다고 말했다.

그의 부대가 평지에 있던 한 마을에서 습격 당해, 러시아 제 기관총이 그를 향해 사격하던 일을 설명했다.

“머리가 정말 빠르게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내 가족에게는 어떤 일이 생길까? 내 아이는? 내 아내는? 자신의 가족에 대한 생각으로 악마가 정신을 빼놓으려는 순간이다. 그러나 나는 알라를 위해 일하고 있다는 사실에 집중하려고 했다.”

2013년 모하메드는 아프간 정보 기관에 잡혀 풀에차르키 교도소로 보내졌다.

탈레반에 가입하기 위해 함께 마을을 떠났던 열 다섯 명의 친구 중 두 명만이 살아있다.

아프간 정부 
영토

쿠나르

아프가니스탄 동부

아프간 영토 지도

십여 년의 전쟁 후 아프가니스탄은 여러 다른 영토로 나눠졌다. 단지 20~30퍼센트만이 정부의 관할 아래 놓여있고 2001년 이후 지금까지 탈레반이 대부분의 영토를 통치한다.

전쟁이 할퀴고 간 아프가니스탄에서 젊은이들에게 주어진 기회는 많지 않고, 그로 인해 많은 이들이 싸움에 참여하는 것을 당연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태어난 곳이 종종 어느 편이 되어 싸울지를 결정하게 된다.

24살의 네마툴라는 아프간 동부의 쿠나르 주에 살았고, 아프간 정부군에 자원 입대를 결정했다.

그의 이야기는 격동을 겪고 있는 이 나라 조직 체계의 문제점을 보여준다.

Nematullah walks through his farm

네마툴라와 그의 농장

네마툴라와 그의 농장

3년 동안 아프간 전역을 다니며 전투를 치뤘던 네마툴라와 그의 부대는 우루즈간 주의 차이나투 지방에 있는 한 외딴 전초 기지로 발령이 났다.

소수의 탈레반이 이곳을 자주 공격해왔다. 네마툴라와 그의 동료 대원들은 적들이 돌아갈 때까지 몇 차례 총격을 주고받는 일에 익숙해졌다.

그러던 어느 밤, 엄청난 수의 탈레반이 공격해왔다. 네마툴라 부대는 압도당했다.

“전투는 끝도 없이 계속됐고 새벽이 되자 총알이 떨어졌다.”고 네마툴라는 말했다.

“탈레반은 우리에게 수갑과 안대를 채웠다. 총개머리판으로 때리며 이교도, 비무슬림의 노예라고 불렀다.”

“탈레반에게 끌려 가며 나는 죽음으로 향하는 한 걸음, 한 걸음을 셌다.”

며칠 후 네마툴라의 가족은 아프간 국방부로부터 아들의 사망 소식과 함께 시체공시소에 있는 시신을 찾아 가라는 말을 들었다.

시신이 담긴 관을 받고 몇 시간 후 가족은 아들의 장례를 치렀다. 시신이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훼손돼 관은 이미 밀봉돼 있었다.

18개월 동안 약혼녀를 포함한 그의 가족은 매일 그의 무덤에 싱싱한 꽃을 가져다 놓고 기도를 드렸다.

십여 년의 전쟁 후 아프가니스탄은 여러 다른 영토로 나눠졌다. 단지 20~30퍼센트만이 정부의 관할 아래 놓여있고 2001년 이후 지금까지 탈레반이 대부분의 영토를 통치한다.

전쟁이 할퀴고 간 아프가니스탄에서 젊은이들에게 주어진 기회는 많지 않고, 그로 인해 많은 이들이 싸움에 참여하는 것을 당연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태어난 곳이 종종 어느 편이 되어 싸울지를 결정하게 된다.

24살의 네마툴라는 아프간 동부의 쿠나르 주에 살았고, 아프간 정부군에 자원 입대를 결정했다.

그의 이야기는 격동을 겪고 있는 이 나라 조직 체계의 문제점을 보여준다.

3년 동안 아프간 전역을 다니며 전투를 치뤘던 네마툴라와 그의 부대는 우루즈간 주의 차이나투 지방에 있는 한 외딴 전초 기지로 발령이 났다.

소수의 탈레반이 이곳을 자주 공격해왔다. 네마툴라와 그의 동료 대원들은 적들이 돌아갈 때까지 몇 차례 총격을 주고받는 일에 익숙해졌다.

그러던 어느 밤, 엄청난 수의 탈레반이 공격해왔다. 네마툴라 부대는 압도당했다.

“전투는 끝도 없이 계속됐고 새벽이 되자 총알이 떨어졌다.”고 네마툴라는 말했다.

“탈레반은 우리에게 수갑과 안대를 채웠다. 총개머리판으로 때리며 이교도, 비무슬림의 노예라고 불렀다.”

“탈레반에게 끌려 가며 나는 죽음으로 향하는 한 걸음, 한 걸음을 셌다.”

며칠 후 네마툴라의 가족은 아프간 국방부로부터 아들의 사망 소식과 함께 시체공시소에 있는 시신을 찾아 가라는 말을 들었다.

시신이 담긴 관을 받고 몇 시간 후 가족은 아들의 장례를 치렀다. 시신이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훼손돼 관은 이미 밀봉돼 있었다.

18개월 동안 약혼녀를 포함한 그의 가족은 매일 그의 무덤에 싱싱한 꽃을 가져다 놓고 기도를 드렸다.

Nematullah with his family at the graveside of the unknown solider buried in his place

한편, 우루즈간에 있는 네마툴라는 깊은 산 속에 있는 거대한 동굴로 끌려갔다. 54명의 다른 포로들과 함께 그는 돌을 파서 자신의 감옥을 만들었다.

1년 6개월 동안 그는 직접 지은 감옥에 11명의 다른 죄수와 함께 투옥됐다. 모두 아프간 군인과 경찰이었다. 양손과 양발은 하루 24시간 족쇄에 묶여 있었다.

네마툴라의 기억에 따르면 탈레반이 준 음식이 거의 없어 포로 생활의 단조로움은 굶주림 만큼이나 지독했다. 마침내 어느 날 밤 자정 무렵, 그와 그의 감방 동료들은 사방에서 들리는 귀가 찢어질듯한 폭발음에 잠에서 깼다.

이들 머리 위에서 일어난 공습 덕분에 감옥이 파괴되고 자유의 몸이 되었다.

가장 먼저 그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예요, 네마’라고 말하자 아버지가 ‘네마 누구?’라고 답했다. ‘아빠 아들이요’라고 했지만, 그는 믿지 않았다.”

몇 장의 셀카를 보내자 아버지는 그제서야 자신의 아들이 살아있음을 믿었다.

Nematullah walks through the graveyard where the fallen solider is buried

라마단의 첫 날, 쿠나르의 집으로 돌아오자 그의 귀환 소식은 이미 동네에 퍼져있었다. 잔치가 열리고 있었지만 자신의 가족과 재회하기 전 네마툴라가 꼭 방문해야 할 곳이 있었다. 바로 이름도 없이 스러져 간 동료 군인의 무덤에 기도를 드리러 갔다.

고향으로 돌아온 후 네마툴라와 그의 새 신부는 매일같이 이름 모를 그 병사의 무덤을 방문한다. 이제 자신들에게 그는 형제이자 책임이라고 말했다.  

신원 파악이 잘못된 경우는 드물지 않다. BBC는 여러 건의 비슷한 사건에 대해 들었다. 예를 들어 납치되었던 아프간 병사가 집에 돌아와보니 가족은 정부로부터 받은 밀봉된 관으로 장례를 치뤘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여러 번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아프간 정부는 답변을 회피했다.

포로 생활로 인한 트라우마에도 불구하고, 네마툴라는 조국을 지키기 위해 반드시 전쟁터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우루즈간에 있는 네마툴라는 깊은 산 속에 있는 거대한 동굴로 끌려갔다. 54명의 다른 포로들과 함께 그는 돌을 파서 자신의 감옥을 만들었다.

1년 6개월 동안 그는 직접 지은 감옥에 11명의 다른 죄수와 함께 투옥됐다. 모두 아프간 군인과 경찰이었다. 양손과 양발은 하루 24시간 족쇄에 묶여 있었다.

네마툴라의 기억에 따르면 탈레반이 준 음식이 거의 없어 포로 생활의 단조로움은 굶주림 만큼이나 지독했다. 마침내 어느 날 밤 자정 무렵, 그와 그의 감방 동료들은 사방에서 들리는 귀가 찢어질듯한 폭발음에 잠에서 깼다.

이들 머리 위에서 일어난 공습 덕분에 감옥이 파괴되고 자유의 몸이 되었다.

가장 먼저 그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예요, 네마’라고 말하자 아버지가 ‘네마 누구?’라고 답했다. ‘아빠 아들이요’라고 했지만, 그는 믿지 않았다.”

몇 장의 셀카를 보내자 아버지는 그제서야 자신의 아들이 살아있음을 믿었다.

라마단의 첫 날, 쿠나르의 집으로 돌아오자 그의 귀환 소식은 이미 동네에 퍼져있었다. 잔치가 열리고 있었지만 자신의 가족과 재회하기전 네마툴라가 꼭 방문해야 할 곳이 있었다. 바로 이름도 없이 스러져 간 동료 군인의 무덤에 기도를 드리러 갔다.

고향으로 돌아온 후 네마툴라와 그의 새 신부는 매일같이 이름 모를 그 병사의 무덤을 방문한다. 이제 자신들에게 그는 형제이자 책임이라고 말했다.  

신원 파악이 잘못된 경우는 드물지 않다. BBC는 여러 건의 비슷한 사건에 대해 들었다. 예를 들어 납치되었던 아프간 병사가 집에 돌아와보니 가족은 정부로부터 받은 밀봉된 관으로 장례를 치뤘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여러 번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아프간 정부는 답변을 회피했다.

포로 생활로 인한 트라우마에도 불구하고, 네마툴라는 조국을 지키기 위해 반드시 전쟁터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민간인 영토

카불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십 여년의 전쟁은 많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무력감을 남겼는데, 특히 가장 힘 없고 취약한 여성과 아이들이 그랬다.

정부 통치의 주요 도시에 거주하던 여성들의 삶은 탈레반이 들어온 후 급격하게 바뀌었다. 선출된 정부 조직과 함께 아프간과 연합군이 치안을 강화해, 더 많은 여자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더 많은 여성들이 직장에 다닐 수 있었다.

탈레반 지배 아래 여자 아이가 교육을 받을 기회는 0%에 가깝다.

비록 세계 최저 수준이기는 하나 여자 청소년이 교육 받을 기회는 37%까지 높아졌다.

그러나 탈레반 통제 지역의 경우, 교육과 직업에 대한 여성의 자유는 제한적이다. 또한 탈레반이 더 많은 권력을 가지게 될 경우 여성들은 자유가 제한될 것을 걱정했다.

Sola holding a rabbit(C) with her Mother-in-law (L) and her mother Nargis (R)

소라(중앙)와 함께 있는 나르기스(우)와 나르기스의 시어머니(좌)

소라(중앙)와 함께 있는 나르기스(우)와 나르기스의 시어머니(좌)

나르기스는 말했다.

“학교에 가거나 직장에 다닐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대부분을 잃을 것이다.”

탈레반은 여성들에게 권리를 준다고 약속한 바 있다. 그러나 많은 비평가들은 탈레반이 과연 얼마나 바뀔지 미심쩍어 한다.

나르기스도 그중 한 명이다.

“탈레반이 변한다는 데 의문이 든다. 왜냐면 그들은 평화를 말하면서 폭탄을 터뜨려 우리의 무슬림 형제와 자매를 죽였다. 무슨 변화가 그러한가?”

나르기스는 학교를 떠나게 된 이유가 탈레반이 오고 난 뒤 그 후의 불안 때문이라고 했다.  

“탈레반이 왔을 때 나는 4교시 수업을 듣고 있었다. 전투가 시작되고 학교는 문을 닫았다. 여자 아이들은 외출이 허락되지 않았다. 당시 나는 9살인지 10살이었는데 머리에 스카프를 쓰고(히잡을 쓰라고 강요당했다) 집 안에 앉아 있었다. 무서워서 집 밖을 나가지 못했다. 우리 가족은 파키스탄으로 이주했고 나는 학교는 그만두었다. 집으로 다시 돌아와 내가 많은 것을 잃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르기스는 결코 자신과 같은 운명을 겪지 않도록 하겠다는 단호한 의지로, 8살의 막내딸 소라를 계속 학교에 보낸다.

소라가 이미 배운 것 중 하나는 전쟁의 폭력성이다. 그는 최근 탈레반의 끔찍한 자살 폭탄 현장을 보았다.

“폭탄이 터지는 것을 봤다. 젊은 사람들이 죽는 것을 봤다.” 소라가 말했다. “나는 정말 겁을 먹었고 울었다. 엄마가 나를 붙잡아 택시를잡아 타고 집에 왔다.”

아프간 전역에서 일상의 폭력이 줄지 않는 가운데 평화 회담은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이 나라의 유일한 희망인 듯하다. 그러나 미국과 탈레반이 먼저 회담을 갖고, 그 다음 아프간 정부가 참여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인 듯하다.

아프간 정부는 양측 모두 한 달 간의 휴전에 동의할 경우에만 탈레반과 만날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탈레반은 아프간에서 모든 외국 병력이 철수한 다음에 아프간 정부와 협상할 것이라고 말했다.

때문에 나르기스와 같은 민간인이 이 나라에 어떤 변화를 기대하는 데 회의적이라는 게 전혀 놀랍지 않다.

“평화는 오지 않을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은 여러 사람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잡아 당기는 천 조각이 되었다. 누가 친구인지, 적인지 구분하기 힘든 상황이다.”

“이 나라를 차지하는게 미국이든, 탈레반이든, 정부든 간에 우리가 원하는 건 단지 평화다.”  

기사에 등장하는 인물 중 일부는 가명을 썼다

십 여년의 전쟁은 많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무력감을 남겼는데, 특히 가장 힘 없고 취약한 여성과 아이들이 그랬다.

정부 통치의 주요 도시에 거주하던 여성들의 삶은 탈레반이 들어온 후 급격하게 바뀌었다. 선출된 정부 조직과 함께 아프간과 연합군이 치안을 강화해, 더 많은 여자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더 많은 여성들이 직장에 다닐 수 있었다.

탈레반 지배 아래 여자 아이가 교육을 받을 기회는 0%에 가깝다.

비록 세계 최저 수준이기는 하나 여자 청소년이 교육 받을 기회는 37%까지 높아졌다.

그러나 탈레반 통제 지역의 경우, 교육과 직업에 대한 여성의 자유는 제한적이다. 또한 탈레반이 더 많은 권력을 가지게 될 경우 여성들은 자유가 제한될 것을 걱정했다.

“당연히 여성들은 잃게 될 것이다.” 카불 북부에 사는 교사이자 여섯 아이의 어머니, 30세 나르기스는 말했다.

“학교에 가거나 직장에 다닐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대부분을 잃을 것이다.”

탈레반은 여성들에게 권리를 준다고 약속한 바 있다. 그러나 많은 비평가들은 탈레반이 과연 얼마나 바뀔지 미심쩍어 한다.

나르기스도 그중 한 명이다.

“탈레반이 변한다는 데 의문이 든다. 왜냐면 그들은 평화를 말하면서 폭탄을 터뜨려 우리의 무슬림 형제와 자매를 죽였다. 무슨 변화가 그러한가?”

나르기스는 학교를 떠나게 된 이유가 탈레반이 오고 난 뒤 그 후의 불안 때문이라고 했다.  

“탈레반이 왔을 때 나는 4교시 수업을 듣고 있었다. 전투가 시작되고 학교는 문을 닫았다. 여자 아이들은 외출이 허락되지 않았다. 당시 나는 9살인지 10살이었는데 머리에 스카프를 쓰고(히잡을 쓰라고 강요당했다) 집 안에 앉아 있었다. 무서워서 집 밖을 나가지 못했다. 우리 가족은 파키스탄으로 이주했고 나는 학교는 그만두었다. 집으로 다시 돌아와 내가 많은 것을 잃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르기스는 결코 자신과 같은 운명을 겪지 않도록 하겠다는 단호한 의지로, 8살의 막내딸 소라를 계속 학교에 보낸다.

소라가 이미 배운 것 중 하나는 전쟁의 폭력성이다. 그는 최근 탈레반의 끔찍한 자살 폭탄 현장을 보았다.

“폭탄이 터지는 것을 봤다. 젊은 사람들이 죽는 것을 봤다.” 소라가 말했다. “나는 정말 겁을 먹었고 울었다. 엄마가 나를 붙잡아 택시를잡아 타고 집에 왔다.”

아프간 전역에서 일상의 폭력이 줄지 않는 가운데 평화 회담은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이 나라의 유일한 희망인 듯하다. 그러나 미국과 탈레반이 먼저 회담을 갖고, 그 다음 아프간 정부가 참여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인 듯하다.

아프간 정부는 양측 모두 한 달 간의 휴전에 동의할 경우에만 탈레반과 만날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탈레반은 아프간에서 모든 외국 병력이 철수한 다음에 아프간 정부와 협상할 것이라고 말했다.

때문에 나르기스와 같은 민간인이 이 나라에 어떤 변화를 기대하는 데 회의적이라는 게 전혀 놀랍지 않다.

“평화는 오지 않을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은 여러 사람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잡아 당기는 천 조각이 되었다. 누가 친구인지, 적인지 구분하기 힘든 상황이다.”

“이 나라를 차지하는게 미국이든, 탈레반이든, 정부든 간에 우리가 원하는 건 단지 평화다.”  

기사에 등장하는 인물 중 일부는 가명을 썼다

A wall of graffiti in Kabul depicting instead of guns and bombs, love hearts

제작진

글 : 아우리야 아타피, 클레어 프레스

추가 취재 : 이브라힘 사피, 자비훌라 라힘자이, 나지브 파순, 주알 아하드, 잠자마 니아치

제작 : 클레어 프레스

사진 : 에드 램, 아우리야 아타피, 이브라힘 사피, 크레어 프레스, 데릭 에반스

편집 : 사라 버클리

2019년 11월

제작진

글 : 아우리야 아타피, 클레어 프레스

추가 취재 : 이브라힘 사피, 자비훌라 라힘자이, 나지브 파순, 주알 아하드, 잠자마 니아치

제작 : 클레어 프레스

사진 : 에드 램, 아우리야 아타피, 이브라힘 사피, 크레어 프레스, 데릭 에반스

편집 : 사라 버클리

2019년 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