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1920년대 조선인과 대화할 때 알아야 할 다섯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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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캡션 조선사람 조선글로! 삼천리에 실린 한글 타자기 광고 포스터와 문구

삼천리는 1929년 창간한 대중 잡지다.

한라에서 백두산까지 삼천리 금수강산에 사는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잡지를 만들겠다는 포부에서 시작됐다.

잡지를 창간한 발행인 김동환은 조선일보 기자 출신으로 당시 대중의 관심을 끌만한 사회 문제를 노련하게 포착했다.

특히 기사를 다루는 접근 방식이 신선했다. 이례적으로 독자 공모를 받거나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초청해 좌담회를 열기도 했다.

삼천리는 당시 가장 많은 발행 부수의 대중 잡지임에도 불구하고, 학계에서는 오랫동안 금기됐다.

1990년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삼천리에 대한 연구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발행인 김동환이 월북했다는 사실과 1941년 폐간되기 2~3년 전부터는 친일관련 내용을 다뤘다는 이유 때문이다.

2000년대 초반부터 삼천리 잡지를 연구해 온 천정환 성균관대 국문학과 교수는 "어떻게 하면 한국인이 더 살 수 있을까 고민해 나온 책이 삼천리다. 그 안에는 근대를 살아가던 한국인의 욕망과 절망이 모두 담겨있다"고 지적한다.

1941년 폐간될 때까지 정치, 사회, 역사, 시사 등 각 분야에 대한 다양한 글을 실었다. 덕분에 당시 생활상에 대한 비교적 상세한 정보가 담겨 있다.

맞춤법이나 용어는 지금과 다르지만 삼천리가 소개한 당시 생활 모습은 현대와 유사한 점도 많다.

김선미 작가는 지난 2013년부터 현재까지 잡지 삼천리를 한글화하고 있다.

그가 소개하는 1920~30대 조선인을 이해하는 다섯 가지를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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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캡션 종이를 구하기 어려워 삼천리의 판형은 매호 달라졌다

페미니즘

'탈 코르셋'은 그때도 논쟁거리였다.

짧은 단발머리에 서구식 복장을 하고 조혼을 거부하는 신여성들을 일부에선 외국 문화를 동경하는 모던 걸이라고 낮춰 부르고, '모던 걸이 아니라 못된 것'이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는 남녀보다는 신구 간 대립이 컸다.

1936년 2월호를 위해 삼천리는 자칭 신여성과 구여성을 모두 초대해 서로 대화를 나눠보는 '신구 여성 좌담회'를 기획하기도 했다.

"나는 구여성이죠. 그런데 요새 가만히 신여성들의 행동을 살펴보면 점점 남성적으로 변해가는 모양입니다."

"나는 신여성이올시다. 그런데 방금 말씀하신 문제는 역시 정도의 문제이고 또한 그런 교태가 여자의 절대 조건은 아니겠죠. 하물며 고전미보다 건강미를 본위로 하는 오늘날의 시대인으로서 그따위 문제에 전력할 필요가 있을까요"

구여성은 '새로운 학문을 배워 세상을 다 아는 척하지만 이론으로만 알지 현실은 모르는 철부지' 신여성이 불편했다.

또, '신여성은 수입은 없으면서 자기 이상대로 사치를 하여 남편에게 고통을 준다'고 비판했다.

반면, 신여성은 '버스나 차 안에서 다른 사람의 발을 밟고도 미안한 줄 모르는 건 약과요, 극장이나 사람 많이 모인 곳에 갓난 아이를 데리고 와서 우는 아이를 달래 지도 않고 수다 떨기에 바쁜' 구여성에게 불만을 나타냈다.

이혼

1920년대 이혼이라는 주제는 자유연애나 자유 결혼과 함께 당시 자주 등장하는 논쟁거리였다.

특히 유학생 사이에서 화두였다.

당시의 조혼 풍습 때문에 미성년자도 이미 집안에서 정해준 혼처가 있기도 했지만, 도쿄나 상하이로 간 유학생들 가운데는 학업 중 마음이 통하는 이성을 만나게 되어 자유 결혼을 꿈꾸는 경우도 있었다.

이혼 증가는 당시 사회적인 현상이었다. 그 이유는 민법 개정 때문이었다. 1923년부터 부부 쌍방에 대해 이혼 청구를 인정하여 여성도 이혼 청구가 허용된 것이다.

1920년대 중반에 들면 이혼에 관한 법적 규정과 권리에 대한 기사가 자주 등장한다.

1929년 이인 변호사가 삼천리에 기고한 '이혼 문제와 현대의 법률'도 그 중 하나다. 그는 독립 운동가를 상대로 무료 변호를 했던 인권 변호사다.

안창호 선생의 변호를 맡기도 했으며 정부 수립 후에는 초대 법무부 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그에 따르면 "민법에서는 여자 편에서 이혼을 제기하기 쉽도록 보호하고 있으나 실제 법정에서 여성이 이혼을 제기하는 경우는 10분의 1밖에 안된다"고 지적한다.

또 여성은 남편의 재산 상태에 따라 위자료를 청구할 수 있으니 경제력이 없다며 참고 살지 말라고 조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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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캡션 잡지에 실린 광고들. 당시 신여성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성욕

삼천리는 시대의 목소리를 담는 방법의 하나로 설문 조사를 택했다.

예를 들어 '내가 서울의 시장이 된다면', '조선에 태어난 게 불행한가, 행복한가', '영어로 번역해서 해외에 알리고 싶은 문학 작품을 추천해달라'는 질문을 던지고 각계각층의 지식인들에게 답을 듣는 형식이었다.

이것은 당시 일본의 검열을 피하며 민감한 주제를 잡지에서 다룰 수 있는 장치이기도 했다.

1931년 3월호에 실린 설문 조사 질문은 '재소 생활 중 성욕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나'다.

이 조사에는 독립운동을 하다 옥고를 치룬 사람들이 참여하여 성욕을 포함해 재소자들의 기본적인 권리도 환기시키고 있다.

시인이자 승려 한용운은 "인간 도리의 문제로 바라볼 때 여기에 대한 무슨 방책이 없으면 아니될 것이다. 들은 즉 미국에서는 감옥 내에서 일주일에 한 번, 한 달에 한 번 가족과 같은 방을 쓰는 것을 허용한다고 들었고 옥내에서 같은 방을 쓰는 것을 허락할뿐더러 외출도 한다고 한다. 본능을 막는 것은 인간 도리 상의 문제다"고 지적했다.

인간의 도리는 인권의 옛말이다.

조선일보 기자 출신이자 사회주의 운동가 임원근도 "재옥 중 성욕 문제에 대하여 나의 경험을 솔직하게 고백한다면 처음 투옥되어 얼마간은 심신이 가라앉지 않아서 성에 대한 잡상은 적었다. 그러나 생물은 언제든지 주위환경에 적응하게 생활방식을 꾸며내는 것임으로 약 2-3개월 지나니 그제부터는 이 생리적 문제에 번민 아니하였다고 고백할 용기가 없다. 솔직하게 말하면 며칠에 한 번씩 수음다"고 밝혔다.

해외여행

삼천리는 외국 여행을 다녀온 유명 인사들의 기행문도 자주 실었다.

도쿄, 상하이와 같은 인접 도시뿐만 아니라 태평양 넘어 필리핀, 하와이까지 다뤘다.

화가 나혜석이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타고 프랑스의 파리를 다녀오는 유럽 여행기, 변호사이자 외교관이었던 허헌은 배를 타고 일본의 요코하마에서 하와이를 거쳐 미국, 다시 유럽으로 가는 세계 여행기를 실기도 했다.

허헌은 외교적으로 대외적으로 조선을 알리기 위해 동분서주했으며, 미국 방문길에는 캘빈 쿨리지 대통령과 만나고,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에서는 의회에 방문하기도 한다.

삼천리에 자주 소개되는 의외의 나라는 당시 한자어 애란(愛蘭)으로 불렸던 아일랜드다. 5백 년 가까이 영국의 식민지였으나 19세기 말 독립을 되찾은 아일랜드의 역사를 통해 희망을 얻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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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캡션 일본 관광객들을 위해 1935년 발행된 경성 안내서

여름 휴가

"내가 다니던 신문사에는 사규에 성실하게 일을 한 사원에게는 일 년에 2주일 동안의 휴가를 신청할 수 있다. 하지만 상황에 따라 쉴 수 있으니 실상은 기껏해야 한 닷새 놀 수 있다. 이 휴가는 흔히들 삼복 중에 얻어 썼으며 사원들은 번갈아 가며 이 휴가를 얻어야 했다."

1940년 7월호에 실린 기행문 '선경묘향산'은 당시 조선일보를 다니던 노천명이 휴가를 얻어 북한의 묘향산을 다녀온다는 내용이다.

이를 보면 당시에도 직원들이 돌아가며 하기휴가를 다녀왔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1920년대 시작된 노동 운동 결과, 사업장마다 노조가 운영됐기 때문이다.

휴가를 떠나는 여정 또한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노천명은 어디서 5일 간의 시간을 잘 보낼지 고민 끝에 회사에서 무료 철도 이용권을 받아 서울에서 야간 열차를 타고 평양으로 이동 후 다음 날 아침 만포진선을 탄다.

이 노선은 지금도 북한에서 묘향산을 연결하는 중요한 관광 노선으로 전해진다.

노천명은 '모가지 길어 슬픈 짐승'으로 시작하는 시, [사슴]으로 잘 알려진 시인이자 기자였다.

그러나 일제 말기 전쟁을 찬양하고 전사자들을 칭송하는 시를 쓰며 친일파로 평가된다.

또 한국 전쟁 중에는 조선인민군에 부역하였다가 체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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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캡션 일본에서 발행된 경성관련 관광 책자

친일과 월북으로 금기

삼천리의 발행인 김동환은 해방 후 언론인 중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반민특위에서 자수하여 자신의 친일행적을 반성했다.

1941년 삼천리가 폐간되기까지 매달 판형이나 종이가 바뀌기 일쑤였는데 이는 전쟁 통에 물자를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폐간 직전에는 원고료를 받지 못한 작가들이 수시로 전화해 업무를 보기 어려웠다는 증언도 있다.

천정환 교수는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고 지식인들이 더 이상 꿈을 꿀 수 없게 되면서 대부분 친일에 나서게 된다. 실제로 일본이 42년까지 승승장구했으니 결국 이게 현실이 아닐까라고 생각하게 됐을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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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캡션 현재 서울역을 중심으로 그려진 경성 시가지 지도

삼천리의 재발견

천 교수에 따르면 1930년대 당시 조선에는 우리가 지금 누리는 모든 현대 문화가 존재했다.

하지만 평등하게 주어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새로운 문화를 선망했지만 향유하지 못했다.

연애, 이혼, 유학, 이민, 인권을 욕망하지만 손에 쥘 수는 없다.

오히려 고뇌, 연민, 차별, 억압 속의 가난하고 불안한 삶이었다. 그리고 30년대 후반, 거대한 전쟁에 휩쓸리게 된다.

때문에 "이 시대를 하나의 시선으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고 천 교수는 당부한다.

김선미 작가는 지난 2013년부터 삼천리를 한글로 다시 펴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

국한문이 혼용된 원문에 독음을 달아 한자에 익숙지 않은 사람도 쉽게 읽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는 삼천리의 매력 중 하나로 '현대성'을 꼽았다.

"독립운동과 친일로 이분화된 시절이 아닌, 시대를 온전히 몸으로 겪고 있는 사람들의 현실이 한눈에 펼쳐진다"라고 BBC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그는 온라인에서 주제어나 소재로 삼천리 기사를 검색할 수 있는 웹사이트도 개설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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