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니 마다키젤라: 넬슨 만델라를 사랑한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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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니 만델라는 누구였나?

지난 2일(현지시간) 항년 81세로 사망한 위니 마디키젤라-만델라 여사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자 남아공 민주화의 상징인 고(故) 넬슨 만델라의 전 부인이었다.

위니는 30년 동안 넬슨 만델라와 함께 반인종차별 투쟁의 상징이었고, 그녀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후, 요하네스버그 소웨토에 있는 그녀의 집에는 수많은 조문객과 정치인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

만델라 전 대통령은 총 세 번의 결혼식을 올렸고, 위니 만델라 여사는 그의 둘째 부인이었다.

같이 한 시기는 달랐지만 만델라 전 대통령의 소중한 파트너가 되어주었던 세명의 여인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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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부인: 에블린 마세

만델라 전 대통령은 이스턴케이프 시골 지방의 중매결혼을 피해 요하네스버그에 도착한지 3년 후 에블린 마세와 결혼했다. 당시 22세였던 에블린은 만델라의 정치적 멘토였던 월터 시술루의 사촌이었고 만델라의 나이는 26세였다.

만델라 전 대통령이 1990년에 출감되었을 때 출판된 그의 전기 'Higher Than Hope'에 의하면, 에블린은 "첫눈에 그와 사랑에 빠졌던 것 같다. 만난 지 며칠 만에 사귀게 되었고 몇 달 뒤 그가 청혼을 했다"라고 말했다.

둘은 13년간 결혼 생활을 했다.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은 결혼 기간의 대부분을 법학 공부에 주력했고, 에블린은 간호사로 근무하며 가족을 부양했다.

그들은 네 명의 자녀를 낳았다. 9개월 된 둘째 아이의 사망은 에블린에게 치명적이었고 그녀를 더욱 더 종교적으로 변하게 하였다.

만델라 전 대통령은 점점 더 정치적으로 바뀌어갔지만 에블린은 정치엔 전혀 관심이 없는 '여호와의 증인' 신도였다.

"나는 내 삶과 싸움을 포기할 수 없었고, 그녀(에블린 마세)는 가족 이외의 것에 헌신하며 살 수 없었다"라며 만델라 전 대통령은 그의 자서전 '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Long Walk to Freedom)'에서 저술했다.

둘은 쓰라린 결혼의 최후를 맞아야 했다. 만델라가 반역죄로 체포된 후 보석으로 집으로 돌아왔을때 에블린은 이미 집을 떠난 후였다.

만델라 전 대통령이 1964년에 종신형 선고를 받은 지 5년 후, 그들의 장남 마디바 템베킬레(템비)가 자동차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만델라의 전기 작가인 앤서니 샘슨에 따르면, 만델라 전 대통령은 에블린에게 애도의 메시지를 보냈고 이는 그가 수감되어 있던 당시 에블린과 나눈 유일한 대화였다고 한다. 당시 에블린은 이스턴케이프주에서 식료품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1990년 만델라 전 대통령이 석방되었을 때 일각에선 이를 그리스도의 재림과 비교하였다. 이에 에블린은 프레드 브릿지랜드 기자에게 "사람들이 넬슨을 이렇게 표현하다니 참 어리석다. 어떻게 바람을 피고 아내와 자식을 버린 자가 그리스도가 될 수 있겠느냐. 온 세상이 넬슨을 지나치게 숭배한다. 넬슨은 그냥 사람일 뿐"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후 그녀는 만델라를 향한 사람들의 과찬에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만델라 전 대통령이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그녀는 전 남편이 석방된 이후 그를 만나진 못했지만 "사람들이 그를 매우 좋아한다"는 것은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고 인터뷰에서 말했다.

그녀는 "내가 여호와에 관해 이야기 하려고 사람들의 집을 방문할 때 마다 그의 사진이 벽에 걸려있는 것을 항상 본다. 그의 힘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비록 의로운 사람들이 아닐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그의 뜻을 이룬다"고 덧붙였다.

에블린은 만델라와 이혼한 지 40년 이상이 지난 1988년, 여호와의 증인 신자인 시몬 라케필레와 재혼했다. 그녀는 2004년에 생을 마감했다.

둘째 부인: 위니 마디키젤라-만델라

넬슨 만델라와 위니 마디키젤라의 사랑은 만델라가 반역죄로 재판을 받던 중 꽃피었다.

만델라보다 16살 어렸던 위니는 당시 22세로, 사회복지사로 활동하며 정치 선동가를 꿈꾸고 있었다.

"나는 그녀(위니 만델라)를 사랑하는 동시에 정치화했다"고 만델라는 그의 자서전에서 말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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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캡션 넬슨 만델라(왼쪽)와 위니 마다키젤라의 결혼식 사진

1984년 그녀의 회고록 'Part of my Soul Went with Him'에서, 위니는 만델라 전 대통령이 자신에게 공식적으로 청혼한 적이 없다고했다.

"어느 날 넬슨이 길에서 갑자기 멈춰서 말했다. '있잖아요, 내가 아는 재봉사가 있는데, 찾아가면 당신의 웨딩드레스를 만들어 줄 거에요. 신부 들러리는 몇명으로 하고 싶어요?'"

"나는 그렇게 내가 그와 결혼한다는 걸 알게 됐다. 하지만 무례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오히려 당연했다. 나는 그저 '언제요?'라고 물었다."

위니는 1983년 영화감독 케빈 해리스와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사실상 죄수와 결혼하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넬슨은 결혼 허락을 받아야만 했다. 그는 단지 죄수가 아니라, (이동과 면회 등 여러 방면에서) 금지를 당한 상태였고, 당시 프리토리아에서 재판이 진행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에게 트란스케이에 가서 결혼할 수 있는 4일이 주어졌다."

둘은 결혼 후 두 딸을 낳았지만, 가족으로서 함께 보내는 시간은 거의 없었다.

위니는 회고록에서 "내가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거란 기대 조차 할 수 없었다. 내가 기억하는 한, 어린 신부가 남편과 함께 앉아 시간을 보내는 것과 같은 가족의 생활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사람들에게서 넬슨을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에겐 항상 투쟁과 나라가 먼저였다"고 말했다.

결혼 3년 후, 만델라 전 대통령은 지하로 숨어야 했다. 그는 파괴 공작으로 1962년 체포된 후 5년 형을 선고받았다.

위니는 샘슨 작가에게 "진실을 말하자면, 나는 그를 전혀 알지 못했다"라고 인정했다.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감옥에 같혀 있는 동안 리보니아에서 그의 재판이 시작됐다. 당시 그는 사형에 처할 수도 있었지만,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이때부터 위니는 그녀의 이름으로 투쟁을 이어가기로 했다.

그녀는 금지명령과 징역을 선고받았고, 브랜드포트의 흑인 거주 지역으로 추방되었다. 남편 만델라와의 면회도 어려웠다.

위니는 해리스 감독에게 "추방은 많은 희생이 따르는 감옥에 갇혀있는 것과 같다. 내 아이들을 보지 못하고 그들에게 부모 노릇을 할 기회조차 없는것이 제일 힘들었다. 사실상 우리 둘 다 아이들에게 부모 역할을 제대로 해줄 상황이 안됐다"라고 털어놓았다.

정치적 논란

위니 만델라는 만델라 전 대통령과 함께 30년 동안 반인종차별 투쟁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지만, 수십 년 동안 정치적 논란에 휩싸인 인물이기도 하다.

1980년대 후반, 그녀는 다른 아프리카 민족 회의 의원들에게 소웨토 일부 지역에서 테러를 조장한 혐의를 받았다.

또한, '죽음의 목걸이'라고도 불리는 속결 처형방법 '넥 레이싱(necklacing)' 실행을 지지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넥 레이싱'은 휘발유가 들어가 있는 고무 타이어를 목에 건 후 불을 붙여 처형하는 방법을 말한다.

1991년 위니는 경찰 정보원이라는 의심을 받은 14세 청소년 활동가를 살해한 혐의를 받았고, 납치와 구타혐의로 6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런 혐의에도 불구하고 위니는 만델라 전 대통령의 석방을 위해 단결된 태도를 보였다. 만델라 전 대통령은 1990년 2월 석방되었다.

이미지 캡션 <사진> 만델라 전 대통령이 석방된 이후, 부부의 사이는 멀어지기 시작했다

멀어진 사이

위니는 아프리카 민족회의(ANC)의 지도자들이 감옥에서 생을 마감할 수도 있다는 큰 두려움이 있었다고 말했다.

2010년 영국 일간지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위니는 만델라 전 대통령이 석방되던 날, 그는 자유롭게 걸어 나가기 전 기쁨으로 가득 찬 상태였고, 둘은 사람들의 환대에 매우 놀랐다고 전했다.

둘의 정치적, 개인적 견해 차이는 점점 벌어졌고 위니의 불륜 의혹과 함께 그들은 결국 갈라서게 됐다. 이는 만델라가 대통령으로 당선되기 전이었다.

둘은 이혼했고, 만델라 전 대통령이 출소한 이후, 위니는 그가 깨어있는 동안 단 한 번도 그의 침실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혼 소송 절차 중 밝혀졌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위니는 만델라에 대한 따듯한 기억을 회고했다. 만델라 전 대통령의 석방 20주년 기념일에 참석해서 "그는 사랑이 넘치고, 아이들을 위하며, 만인의 사람이고 매우 열심히 일했다"고 연설했다.

"두려움을 모르는 불굴의 도덕심, 완전한 자유를 향한 투쟁을 위해 보여준 흔들림 없는 헌신, 그리고 자신의 속도에 맞춰 나아가는 그의 강경함이 그만의 특징이다."

"또한, 그는 적을 떠안고 자신의 편으로 만들 줄 알고,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도 갖고 있다. 그는 보통의 사람과 마찬가지로 천사가 아니다. 그는 절대 자신을 성인으로 칭하지 않았다."


위니 마디키젤라-만델라

1936: 남아프리카 공화국 트란스케이에서 태어남

1958: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과 결혼

1969: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격리정책 반대 운동으로 18개월 동안 수감됨

1976: 인종차별정책 당국에 의해 시골 지역으로 추방됨

1991: 납치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음

1996: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과 이혼

2003: 사기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음


셋째 부인: 그라사 마셸

그라사 마셸은 만델라 전 대통령의 임기가 끝날 무렵 결혼했다. 그녀는 독립운동가와 결혼하는 것이 어떤지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모잠비크의 독립 지도자이자 대통령이었던 사모라 마셸의 미망인이었다. 사모라 마셸은 1986년 비행기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이 사고가 과연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종차별정책이었던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에 의해 행해진 것인지에 대해선 아직 조사 중이다.

샘슨 작가에 의하면, 그라사는 만델라 전 대통령과 결혼하기 2년 전, "우리가 마침내 서로를 발견하고 함께 삶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이 정말 멋진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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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캡션 만델라 전 대통령은 1988년 그의 80번째 생일에 그라사 마셸과 결혼했다

만델라 전 대통령보다 27살 어렸던 그라사는, 처음엔 만델라와 결혼하기를 꺼렸다고 한다. 그녀가 모잠비크 사람들에게 느끼는 의무감과 이혼한 전 부인 위니와 만델라 사이에 있었던 긴장감 때문.

샘슨 작가에 의하면, 그라사는 1996년 요하네스버그에서 그와 매달 2주를 함께 보내기로 했다고 한다. 그녀는 만델라 전 대통령의 이른 기상 시간과 취침 시간에 적응하는 것을 어려워했다.

만델라는 "매우 성급"하고 "아주 완고"할때도 있었다. 그라사는 이전 부인들의 심정에 공감하며, 샘슨 작가에게 "넬슨이 상징적 존재인 것은 맞지만, 성인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결국, 그라사는 압력에 굴복해 만델라 전 대통령과 결혼하기로 했고, 그들은 1988년 만델라의 80번째 생일에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전 그라사는 이미 6명의 의붓자식과 2명의 자식을 두고 있었다. 그녀는 만델라 전 대통령과 함께 대가족과 많은 손자 손녀를 가진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라사는 계속해서 정치적, 인도주의적 활동을 이어갔다. 그녀는 만델라 전 대통령의 여러 은퇴 과정을 함께했고 그를 숭상하는 사람들로 부터 오는 부담감을 덜어주려고 노력했다.

그녀는 만델라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나기 수년 전 부터, 곧 다가올 그의 죽음에 대해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준비 시키는데 큰 힘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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