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국 간 정상회담의 역사: 러 정상 만난 미 케네디 '내 인생 가장 힘겨운 순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만남에 세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Image copyright Getty Images
이미지 캡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만남에 세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세계 근대사에서 적대국끼리 정상회담을 연 적은 여러 번 있었지만, 이 회담들이 언제나 좋은 결과를 냈던 것은 아니었다.

6.25 전쟁 발발 이후 70년 가까이 적대 관계였던 미국과 북한의 두 정상이 오는 12일 싱가포르에서 만난다.

현직 미국 대통령과 북한 최고 지도자가 마주하는 건 이번이 처음인 만큼, 회담 결과를 전망하기 어렵다는 목소리가 높다. 특히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행보를 예측하기 어려운 인물이라는 점도 불확실성을 키우고 있다.

'회담 성사' 확신 없이 비행기 올라탄 닉슨

1972년 2월 미국 37대 대통령 리처드 닉슨과 당시 중국 지도자 마오쩌둥 전 국가주석의 만남은 미국 근대사상 가장 성공적인 회담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닉슨의 중국 방문은 이른바 '죽의 장막(Bamboo curtain)'을 걷어내고 미국과 중국 사이 냉전을 끝낸 결정적 사건이었다. 이후 미 정계에서 '닉슨 중국에 가다(Nixon goes to China)'라는 말은 적대 세력과의 관계 개선을 모색하는 행보를 일컫는 관용구로 쓰였다.

닉슨-마오 회담은 1971년 4월 미국 탁구팀의 중국 방문으로 '핑퐁(탁구) 외교'의 물꼬를 텄다. 그리고 같은 해 '외교의 귀재'로 불리는 헨리 키신저 당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극비리에 중국을 찾아 저우언라이 당시 중국 총리와 물밑 작업을 벌였다. 1년에 걸친 준비과정이 있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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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캡션 중국 베이징에서 악수하는 마오쩌둥과 리처드 닉슨

하지만 막상 닉슨은 마오 전 주석과 만날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 없이 베이징 행 비행기에 올라탄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미국 내에선 열렬한 반공주의자이자 강경파 공화당원이었던 닉슨이 인구 기준 최대 공산국가였던 중국의 지도자와 만나는 것에 대한 우려도 있었다.

이후 닉슨은 1979년 미국과 중국이 수교를 맺은 뒤, 이듬해 출판된 저서 '더 리얼 워(The Real War)'에서 "대통령은 철저히 사전 계획됐을 때만 정상회담에 가야 한다"며 "산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모른 채 적국과의 회담에 임해선 안 된다"고 썼다.

레이건-고르바초프, '실패했지만 성공한 회담'

1986년 10월 미국 40대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은 북유럽 아이슬란드의 수도 레이캬비크에서 구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공산당 서기장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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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캡션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에서 두번째 만남을 가진 로널드 레이건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이들의 만남은 당시 소련과 미국이 냉전 상태였다는 점, 그리고 1년에 가까운 준비 기간이 있었다는 점에서 닉슨-마오 회담과 닮았다.

레이건은 1985년 11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고르바초프와 회동했다. 당시 레이건은 "만나야 했기 때문에 만났다"며 양국 관계의 "새로운 시작(Fresh Start)"을 언급했다.

하지만 1년 뒤 열린 레이캬비크 회담은 실패로 끝났다.

두 정상은 전략 핵무기 감축 등 많은 부분에서 합의를 이뤄냈다. 그러나 회담 막판 고르바초프가 요격 미사일을 우주에 배치하겠다는 미국의 전략방어구상(SDI), 이른바 '스타워즈' 계획의 폐기를 요청했고, 레이건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회담은 결렬됐다.

레이캬비크 회담은 그럼에도 '실패했지만 성공한 회담'으로 불린다. 회담을 통해 미국과 소련이 양국의 군비축소 의지를 확인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1년이 지난 1987년 말 열린 워싱턴 회담에서 양국은 중거리핵무기폐기협정(INF)을 체결했고, 이는 1989년 몰타 회담에서의 냉전 종결로 이어졌다.

러시아 흐루쇼프 만난 미국 케네디 "내 인생 가장 힘겨운 순간"

미국 35대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과 구 소련 니키타 흐루쇼프 전 서기장과의 1961년 6월 만남은 '외교 참사'로 기록된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이틀에 걸쳐 이어진 미소정상회담은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했고, 도리어 양국을 핵전쟁 문턱까지 몰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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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캡션 오스트리아 빈에서 마주앉은 니키타 흐루쇼프와 존 F. 케네디

일부 역사학자들은 회담 실패의 주원인으로 준비 부족을 꼽는다. 케네디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지 4개월 만에 진행된 회담이었던 데다, 회담의 명확한 전략적 목표가 없었다는 것이다.

미국 텍사스 대학교 제러미 수리 역사학과 교수는 외교 전문지 '포린 어페어스(Foreign Affairs)'에 기고한 글에서 "케네디는 건설적 제안을 내놓지 않았다"며 "소련 지도자가 원하는 것을 고려할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이라고 분석했다.

케네디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흐루쇼프를 만난 뒤 "이런 사람은 처음"이라며 "내 인생에 가장 힘겨웠던 순간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케네디-흐루쇼프 회담의 실패는 바로 다음 해인 1962년, 소련이 핵미사일을 쿠바에 배치한 '쿠바 미사일 위기'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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