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바키아 정권을 무너뜨린 '마피아 살인사건'

지난 3월 2일 슬로바키아에서 잔 쿠치악과 마르티나 쿠츠니로바의 사망 진상촉구를 요구하는 촛불시위가 열렸다 Image copyright Getty Images
이미지 캡션 지난 3월 2일 슬로바키아에서 잔 쿠치악과 마르티나 쿠츠니로바의 사망 진상촉구를 요구하는 촛불시위가 열렸다

잔 쿠치악이 마지막 출근을 하던 날, 그의 책상엔 책이 한 권 놓여있었다. 이탈리아 마피아 조직 '은드란게타'에 관한 책이었다.

슬로바키아 언론사 '악투알리티(Aktuality)에서 일하던 이 젊은 기자는 당시 '특종' 기사 취재에 매달려 있었다. 자신의 조국 슬로바키아 정부를 송두리째 무너지게 할 수 있는 취재였다.

그러나 이 취재는 그의 목숨을 앗아갔다.

쿠치악과 그의 약혼녀 마르티나 쿠츠니로바는 총을 맞은 채 주검으로 발견됐다. 발견된 장소는 수도 브라티슬라바 근교, 둘이 함께 살던 마을인 벨카 마카였다.

둘의 나이는 27세였다.

이탈리아의 '문어발식' 조직범죄

쿠치악은 당시 이탈리아 마피아 조직과 슬로바키아 정부 간의 유착관계를 취재하고 있었다.

해당 취재는 이탈리아 마피아의 중심지인 남부 이탈리아에서부터 자금 세탁이 이뤄진 영국 런던까지 광범위하게 이뤄졌다.

마피아, 청부살인자, 정치인, 그리고 전문직의 '돈 세탁가'들이 다수 연루돼 있었으며 마피아의 손길이 전세계에 뻗치는 걸 증명하는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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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캡션 피코 전 총리는 사퇴하기 직전 책상에 돈다발을 가득 올려 살인사건 해결에 도움을 줄 경우 보상금을 지급할 것이라고 말했다

슬로바키아 여론은 쿠치악과 그의 약혼녀의 죽음에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수도 브라티슬라바에서는 분노한 국민들이 대규모 거리 집회에 나섰다. 그리고 지난 3월, 당시 총리 로베르토 피코가 10년 이상 이끌던 정권이 무너졌다.

잔 쿠치악의 취재 내용은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출고된 기사를 통해 밝혀졌다.

그는 슬로바키아 내 이탈리아 마피아 '은드란게타'의 활동을 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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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캡션 잔 쿠치악과 그의 약혼녀 마르티나 쿠츠니로바는 사망한채 발견됐다

그는 취재 과정 중 은드란게타와 슬로바키아 정부 간의 석연치 않은 '비즈니스 관계'를 발견했다.

은드란게타 조직원으로 알려진 안토니노 바달라와 슬로바키아 정부 수석 보좌관 2명의 관계였다.

수석보좌관 2명은 당시 슬로바키아 피코 총리의 최측근 인사였다.

쿠치악은 전직 슈퍼모델이자 당시 총리의 수석 보좌관이었던 마리아 트로츠코바가 은드란게타와 결탁하여 수년간 유럽연합(EU) 보조금을 불법으로 빼돌렸다는 내용의 기사를 준비 중이었다.

또한 여당 간부들이 바달라에게 세금 및 사업 편의를 제공했다는 내용도 사후 출고된 기사에 담겨있었다.

쿠치악이 살해된 후 세밀한 조사가 진행됐으며 수석보좌관 2명은 '임시' 사퇴했다. 그러나 자신들이 '끔찍한 사건'과 어떠한 관계도 없음을 강력히 주장했다.

피코 전 총리 역시 이 관계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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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캡션 경찰은 안토니노 바달라의 슬로바키아 자택을 수색했고 바달라는 모든 혐의를 부인했다

은드란게타 조직원 안토니노 바달라는 자신이 단순히 사업가라고 주장했다.

슬로바키아에서 유럽연합(EU) 보조금을 불법으로 가로채려 했다는 혐의에 대한 조사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코카인 밀수 혐의를 받고 있던 이탈리아로 송환됐다.

바달라는 모든 혐의를 부인했다.

이후 잔 쿠치악과 마르티나 쿠스니로바 살해용의자에 대한 조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쿠치악은 취재를 하던중 안토니노 바달라가 원래 이탈리아 남부의 작은 마을 보바 마리나에서 악명 높은 '바달라 클랜'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바달라 클랜'은 은드란게타를 구성하는 150여 클랜 중 하나다.

은드란게타: 마피아 왕국의 시대

보바 마리나는 이탈리아 남부 작은 해변 도시다. 멀리서 보면 노인들이 오후의 햇살을 즐기며 야자수 나무 아래서 휴식을 취하고 공원에서 산책하는 평화로운 마을이다.

이미지 캡션 이탈리아 남부 도시 보바 마리나엔 수십 년간 은드란게타의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러나 현재 분홍색 마을회관은 수년 째 문이 닫혀있다. 정부가 마피아 유착혐의로 지방의회인 '코무네 디 보바(Comune di Bova)'의 활동을 중단시켰기 때문이다.

140년간 보바의 '실제 권력'은 은드란게타에게 있었다. 그리고 이 마을을 좌지우지하는 건 은드란게타 산하 두 클랜, '바달라스'와 '리브리스'였다.

1871년 이탈리아 통일 이후 강도단으로 시작한 은드란게타는 현재 전세계 가장 강력한 범죄조직으로 알려져 있으며 조직원 규모는 10,000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중미에서 유럽으로 밀수되는 코카인의 80% 이상을 관리하고 있으며 연간 10조 4,000억 달러 이상 이익을 거두고 있다.

인신매매와 장기매매도 하고 있으며 유럽연합(EU)과 지방 정부 등의 보조금 횡령을 통해 수십 억 원 이상 돈을 벌고 있다.

BBC는 은드란게타가 수십억 유로화를 런던의 변호사와 회계사 등을 통해 불법으로 '자금 세탁'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영국과 이탈리아 법 집행기관들은 은드란게타의 불법 행위들에 대해 공조수사를 시작했다.

이미지 캡션 '반-마피아' 검사로 알려진 그라테리는 은드란게타의 활동이 경제 및 민주주의 파괴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탈리아의 '반-마피아(anti-mafia)' 검사로 유명한 니콜라 그라테리는 은드란게타를 '국제 조직'으로 표현한다.

35년 간 마피아 6000명 이상을 잡아들인 그라테리는 '은드란게타는 가족 및 혈연관계로 구성돼 있어 소탕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마피아 유착관계로 인해 보바 마리나의 마을 회관은 문을 닫은 상태다. 공공사업 계약 파트너 선정이 부정적으로 진행됐다는 혐의가 밝혀지며 보바 마리나의 시장과 의회 역시 활동 중단 조치를 받았다.

새로운 시장 살바토레 마프리치는 유명한 '반-마피아(anti-mafia)' 활동가였다. 그는 마피아 조직이 마을의 발전을 방해했다고 말했다.

"마을의 훌륭한 인재들이 이 아름다운 마을을 떠날 수밖에 없죠. 이 근본적 원인은 우리 어깨의 짐인 은드란게타 때문입니다."

이탈리아 경찰 반-마피아 부서인 '더 가디아 디 피난자'는 은드란게타가 전세계 50여 국가에서 활동 중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더 가디아 디 피난자'는 현재 영국 국가범죄청과 함께 은드란게타의 런던 내 불법 자금세탁 활동을 추적하는 공조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

'더 가디아 디 피난자'의 수사관 콜 에밀리오 피오라는 "근거 없는 공조 수사가 아닙니다. 런던은 투자목적 부동산 거래가 활발한 지역이죠"라고 전했다.

영국 국가범죄청은 현재 수사에 관한 코멘트는 하지 않겠다고 BBC에 전했다. 그러나 매년 범죄 조직들이 런던을 통하여 수십억 파운드 이상을 불법으로 세탁했으며, 그들이 '복잡한 기업구조' 등을 악용했다고 말했다.

영국 국가범죄청의 엠마 스미스는 부패한 전문가들이 범죄 조직들의 자금 세탁을 돕는다고 말했다.

"런던은 금융 중심지기에 매일 이뤄지는 거래 규모가 매우 매우 큽니다. 그리고 그중에는 '불법 자금'이 포함돼 있습니다"

니콜라 그라테리는 점점 커지는 은다란게타의 위협에 전세계 법 집행기관들이 공조하여 대응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는 "은드란게타가 코카인을 팔아 번 수십억 유로화가 정상적인 경제로 간주된다면, 우리 경제는 망하고 민주주의가 파괴될 수 있습니다"라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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