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나라들은 어떻게 핵무장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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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캡션 중국의 군사박물관에 전시된 중국의 두 번째 핵미사일

국제사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핵무기를 손에 쥐고자 한 나라는 북한만이 아니었다. 다른 나라들의 사례를 살펴보면 북한이 핵무장에 사활을 거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으며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짐작하는 것도 가능하다.

1945년 일본에서 핵무기의 가공할 만 위력을 목격한 이후, 세계는 핵의 평화적 이용 증진을 위해 여러 차례 진통 끝에 1970년 핵확산방지조약(NPT)을 발효시켰다.

NPT 체제 하에서 공식적으로 핵무기 보유국으로 인정받는 나라는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중국의 다섯 개 국가에 지나지 않는다.

핵을 보유하지 않은 국가의 핵 보유를 막는 것이 NPT의 주된 목표다. 핵물질의 공급(수출)을 통제하는 원자력원료공급그룹(NSG)과 각국의 핵 활동을 감시하며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원자력 발전 등)을 지원하는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이를 돕는다.

그러나 핵무기를 갖고자 하는 몇몇 국가의 욕망은 NPT 체제로 억누르기엔 역부족이었다. NPT 체제에 합류를 거부하면서 핵무장을 한 나라들도 있고, NPT에 가입했다가 탈퇴를 선언한 북한의 경우도 있다.

한편으로는 핵무장을 추진하다가 포기하고 NPT 체제로 합류한 독특한 경우도 있다.

인도

NPT가 결성된 후 최초의 핵실험을 실시한 나라는 바로 인도(1974년)다. 인도는 '평화적인 핵폭발물'의 이용까지 제한한다는 이유로 NPT 가입을 거부해왔으며 현재까지도 NPT 가입국이 아니다.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최초의 총리가 된 네루는 국제적으로는 핵무기 개발에 반대했지만 국내적으로는 '평화적 용도'의 핵 개발을 적극 지원하는 이중적인 면모를 보였다.

흔히 파키스탄과의 갈등으로 인해 인도가 핵무장을 시작하게 됐다고 알려져 있지만 인도의 핵무장에 직접적인 단초를 제공한 것은 사실 중국이었다고 김준석 가톨릭대 국제학부 교수는 2007년 작성한 논문에서 설명한다.

중국은 1962년 국경분쟁에서 인도를 제압했고 1964년에는 핵실험을 성공시켰다. 1965년에는 제2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발발하면서 인도의 안보 불안은 더욱 악화됐고 결국 이것이 1974년의 핵실험으로 이어진다.

이후 국제사회의 제재로 인도는 핵활동을 자제했으나 파키스탄이 핵무장을 추진하면서 1998년 다시 핵실험을 실시한다.

2006년 인도는 미국과 원자력협정을 체결했다. IAEA의 사찰을 어느 정도 허용하면서 미국으로부터 핵기술과 핵물질을 제공받는 것이 골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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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캡션 조지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과 만모한 싱 당시 인도 총리가 2006년 원자력 협정 체결을 발표하면서 악수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는 NPT에 여전히 가입하지 않았다. 사실상 인도의 핵무기 보유가 용인된 셈이다.

당시 <한겨레>는 미국이 경쟁자로 떠오르는 중국을 겨냥해 인도를 끌어들인 것이라고 분석하면서 "미국이 핵을 포기하도록 압박해온 북한과 이란 등에 잘못된 선례를 남기는 것"이라는 비판을 소개했다.

파키스탄

파키스탄의 핵무장은 앙숙인 인도에 비해 늦다. 주로 미국과의 관계 때문이었다.

1950년대에 파키스탄은 미국의 공산권 봉쇄정책에 매우 중요한 동맹국이었고 때문에 안보를 미국과의 동맹에 크게 의존했다고 김준석 교수는 설명한다.

그러나 인도-파키스탄 전쟁을 겪고 미국과의 동맹이 약화되면서 파키스탄도 비밀리에 핵개발을 시작한다.

미국은 파키스탄의 핵무장을 강력히 반대하며 압력을 행사했지만 1980년에 들어서 상황이 바뀐다.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면서 파키스탄의 전략적 가치가 증대됐기 때문이다.

미국은 파키스탄이 핵실험을 하지 않는 이상 파키스탄의 핵개발 노력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암묵적으로 합의했고 이로 인해 파키스탄의 핵무장은 큰 진전을 이루었다고 김 교수는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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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캡션 파키스탄 핵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A. Q. 칸 박사의 2009년 모습

냉전이 끝나고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면서 미국은 다시 파키스탄의 핵무장에 대해 압력을 행사했지만 이미 파키스탄은 상당한 수준의 진전을 이룬 상태였다.

결국 1998년 인도가 핵실험을 재차 실시하자 파키스탄은 5월 28일과 30일 연이어 두 차례의 핵실험을 실시했다. 현재 파키스탄은 100개가 넘는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파키스탄은 북한의 핵개발에도 영향을 미쳤다. 파키스탄 핵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압둘 카디르 칸(A. Q. Khan) 박사는 북한과 이란, 리비아에 우라늄 농축에 사용되는 가스 원심분리기 기술을 판매했다.

이스라엘

핵보유국으로서 이스라엘의 지위는 매우 독특하다. 모두가 이스라엘을 핵무장 국가로 여기고 있지만 정작 이스라엘은 한번도 자국의 핵무기 보유 여부를 밝힌 바 없다. 이스라엘은 NPT에 가입돼 있지 않다.

지정학적으로 적대적인 아랍 국가들에 포위된 형세에 있는 이스라엘은 프랑스의 협력을 받아 1950년대 중반부터 핵개발을 시작했다.

프랑스가 1960년 핵실험에 성공하면서 이스라엘 또한 핵실험을 실시하지 않고서도 핵무장에 성공했다. 이스라엘이 투발 가능한 핵무기를 완성한 것은 1967년으로 알려져 있다.

이스라엘은 주변국의 핵무장을 강력히 저지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1981년에는 이라크의 원자로를 공습으로 파괴했고 2007년에는 시리아의 원자로를 마찬가지로 파괴했다.

중동에서 거의 유일하게 남은 핵무장 추진 국가인 이란에 대해서도 수차례 공습 위협을 가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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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캡션 존 케리 당시 미 국무장관과 모하마드 자리프 이란 외무장관이 2016년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열린 회담에서 대화하고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남아공은 핵무기 제조에 성공한 이후 이를 자진하여 폐기한 세계에서 유일한 나라다.

우라늄 매장량이 풍부한 데다가 60년대부터 미국의 원자로 기술을 도입하여 운영함으로써 기술력을 갖추고 있던 남아공은 1970년대부터 핵무장을 시도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아공은 이스라엘과의 은밀한 협조를 통해 빠르게 핵무장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1979년 미국의 인공위성이 남아프리카 남단의 프린스 에드워드 섬 근처에서 포착한 섬광은 이스라엘-남아공의 공동 핵실험의 결과라는 것이 중론이지만 이것이 공식적으로 입증된 적은 없다.

남아공이 핵무장을 추진했던 것은 물론 안보 불안 때문이었지만 다소 과장된 것으로 여겨진다. 소련과 쿠바의 군대가 인접국인 앙골라에 주둔하고 있었지만 그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고 조동준 서울시립대 국제관계학과 교수는 한 논문에서 주장한다.

냉전이 끝나면서 앙골라에 주둔했던 쿠바군이 철수하고, 남아공의 인종차별정책과 핵무장으로 인한 국제적 압박이 심해지자 남아공은 1993년 핵무기를 폐기했다.

1994년 IAEA는 사찰 후 남아공이 완전히 핵무기 사업을 철폐했다고 발표했다.

리비아

리비아는 북한과 마찬가지로 NPT에 가입하고서도 비밀리에 핵무장을 시도했다. 북한과 마찬가지로 파키스탄의 A. Q. 칸이 제공한 기술이 밑바탕이 됐다.

그러나 국제사회의 제재에 굴복하여 결국 2003년 대량살상무기 개발을 포기하겠다고 발표했고 IAEA의 사찰을 수용했다. 우라늄 농축용 원심분리기와 스커드 미사일, 화학무기 등이 모두 폐기됐다.

리비아는 핵 포기 이후 미국의 경제제재에서 벗어났으며 국교도 정상화됐다. 그러나 호시절은 오래 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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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캡션 2009년 유엔 총회에서 연설 중인 무아마르 카다피

2011년 아랍의 민주화 시위가 곳곳으로 퍼지면서 리비아에서도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다. 리비아의 독재자 무아마르 알 카다피는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했으며 이는 내전으로 이어졌다.

이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에 바탕하여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국가들이 카다피군을 공습하여 큰 타격을 입혔다. 결국 카다피는 그해 10월 시민군에 붙잡혀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했다.

리비아의 사례는 북한에게 좋은 본보기가 됐다.

"리비아는 서방세계에서 핵포기 대가로 보상을 받았지만 카다피 정권은 거리의 민중 혁명으로 무너졌습니다. 이것은 북한에겐 매우 중요한 교훈입니다."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가 지난 5월 RFA와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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