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북한 미군 탈영병의 기이한 사랑 이야기

A composite picture showing Charles Jenkins as a young US army soldier, and his Japanese wife Hitomi Soga at the age of 17 Image copyright US Army/Kyodo/Alamy Stock Photo
이미지 캡션 젠킨스 하사의 젊은 시절 모습과 소가 히토미가 납치되기 2년 전인 17세 때 모습

매일밤 잠들기 전에 찰스 젠킨스는 소가 히토미에게 몸을 돌려 세 번 키스를 했다. 젠킨스는 군인 신분으로 미국에서 월북했고 소가 히토미는 북한 당국이 강제로 젠킨스와 혼인시킨 납북 일본인이었다.

그는 히토미의 모국어인 일본어로 "오야스미"라고 말했다. 히토미는 젠킨스가 어린 세월을 보낸 노스캐롤라이나에서 쓰는 언어인 영어로 "굿나잇"이라고 답했다.

"우린 우리가 정말로 누구인지, 그리고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결코 잊지 않기 위해 이렇게 했다." 젠킨스는 자신의 회고록에 이렇게 썼다.

그들의 이야기는 음울하고 기이하면서도 눈을 뗄 수 없는 이야기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랑에 대한 한 이야기이다.

기근과 강제노역소로 널리 알려진 은둔의 왕국 북한에 갇힌 이 한 쌍이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끼리 짝을 짓게 하는 북한 당국의 조치 때문이었다.

77세를 일기로 지난 11일 세상을 떠난 젠킨스는 1965년 1월 어느 혹한의 밤에 비틀거리며 북한으로 넘어갔다.

당시 24세였던 그는 취한 데다가 의기소침한 상태였다. 한국 쪽에 배치돼 있던 한 미군 병장은 그가 휴전선을 순찰하다가 유탄에 맞지 않을까 걱정했다. 최악의 경우 베트남에서 죽지 않을까도 싶었다.

젠킨스도 탈영이 위험하다는 건 알았다. 그러나 러시아 대사관에서 망명을 신청하고 포로 교환을 통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나중에 이렇게 썼다. "나는 내가 잠시 도피해 있으려고 했던 나라가 실은 거대하고 미친 감옥과 다름없다는 걸 이해하지 못했다. 한번 들어가면 거의 나올 수 없었다."

네 명의 탈영병

북한은 바로 그를 포로로 사로잡았고 그때부터 40년에 걸친 고난이 시작됐다.

젠킨스는 다른 세 명의 미군 탈영병들과 함께 간소한 단칸방에서 생활했다. 이르게는 1962년부터 탈영한 이들로, 키가 195cm나 되는 일병 제임스 드레스녹, 최초로 월북한 미군으로 알려진 이병 래리 앱셔, 그리고 월북 당시 19세였던 제리 패리쉬가 그들이었다.

이들 넷은 하루에 10시간씩 당시 북한 지도자였던 김일성의 가르침을 강제로 학습해야 했고 정기적으로 구타를 당했다. 절망에 빠진, 그리고 절망과도 같은 지루함에 지친 그들은 "정부 재산을 훔치거나 무모한 하이킹을 하면서" 지루함을 이겨보고자 했다고 젠킨스는 자신의 책 '마지못한 공산주의자'에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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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캡션 사진에서 60대인 제임스 드레스녹은 1962년 DMZ의 지뢰지대를 건너 월북했다

1972년 마침내 이들은 각자 따로 살 수 있게 됐다. 북한 국적도 주어졌다. 그러나 계속 감시를 받고 구타와 고문을 겪어야 했다.

그들은 군사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고 (젠킨스는 남부 출신 특유의 느릿한 말투 때문에 결국 해고됐다) 20부작 짜리 선전영화에서 사악한 미국인 역을 연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로 인해 곧 북한에서 유명인사가 됐다.

그 다음에 내려진 명령은 더욱 놀라웠다. 네 탈영병들은 북한 정권이 수용하고 있던 네 명의 외국인 여성들과 강제로 결혼해야 했다.

왜 북한이 수용자들의 결혼까지 신경써줬을까? 젠킨스가 보기에 그 이유는 분명했다. 그는 북한이 스파이를 양성하기 위한 사업을 진행 중이었다고 여겼다. 서구인처럼 생긴 아이들을 훈련시켜 외국에 첩자로 보내려 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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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캡션 김정일(오른쪽)은 아버지 김일성을 감동시키기 위해 선전영화들을 제작했다

네 명의 미군들은 공산주의 왕국 북한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갔지만 그들과 결혼한 여성들의 경우는 달랐다.

북한은 단지 일본 국민들을 납치했다는 사실만 인정했지만 젠킨스는 자신들과 결혼한 네 명의 각기 다른 국적의 여성들이 북한의 정보기관에 의해 납치됐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놓지 않았죠'

후에 젠킨스 여사가 되는 소가 히토미는 일본의 서쪽 해안에 있는 사도 섬에서 1978년 납치됐다. 당시 그의 나이 19세였다. 북한은 북한의 간첩들에게 일본어와 일본식 행동방식을 가르치기 위해 그를 납치했다. 결과적으로 그의 국적은 그의 남편에게 결코 꿈꾸지 못했던 미래를 안겨줄 수 있었다.

둘이 1980년 결혼했을 때 젠킨스는 평양에서 15년을 홀로 지내온 상태였다. 젠킨스는 나중에 CBS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뭐 이렇게 말해보죠. 딱 한 번 봤습니다. 그리고 놓지 않았죠."

이 신혼부부는 북한에 대한 강렬한 증오 외에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었다. 그러나 점차 둘은 사랑에 빠졌다.

22년에 걸쳐 젠킨스와 히토미는 어느 정도 행복을 찾았다. 서로에게 고마워했다. 두 딸도 생겼다. 이제 30대 중반의 미카와 두 살 어린 브린다였다.

그들의 삶을 바꿔놓을 놀라운 사건은 2002년에 일어났다. 당시 북한의 지도자였던 김정일이 북한이 70년대와 80년대에 13명의 일본 국민들을 납치했음을 인정한 것이었다.

김정일은 이중 8명은 사망했다고 말했으나 (일본은 이에 의혹을 갖고 있다) 5명의 생존자들을 열흘 간 일본에 보내주겠다고 했다. 두 쌍의 부부와 소가 히토미가 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남편은 갈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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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캡션 2004년에 촬영된 젠킨스 가족의 모습

일본은 귀환한 자국 국민들을 열렬히 환영했다. 그들은 다시는 북한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젠킨스와 그의 딸들은 상실감에 사로잡혔다. 미 육군에서 탈영은 최대 무기징역에까지 처해질 수 있다. 노병 젠킨스는 그가 일본에서 부인과 재회하려할 경우 미군이 자신을 체포할 것임을 알았다.

히토미가 일본으로 돌아가고 2년이 지나자 그는 더는 견딜 수 없었다. 젠킨스와 딸들은 히토미를 만나기 위해 인도네시아로 향했다. 인도네시아는 미국과 범죄인 인도 조약을 맺지 않았기 때문이다.

북한은 잠깐만의 방문만 허락한 상태였다. 그러나 당시 일본의 수상인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격려로 탈영병은 가족과 재회하기 위해서라면 군법회의와 옥사까지 각오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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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캡션 2004년 7월 재회한 젠킨스 가족이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공항에서 눈물을 닦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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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캡션 두 딸과 함께 일본땅을 밟았을 때 젠킨스는 본래 나이보다 더 늙어 보였다

2004년 9월 11일, 늙은 탈영병 젠킨스는 미니밴을 타고 병원을 나와 도쿄 교외에 있는 캠프 자마 미군기지로 향했다. 64세였던 그는 십 년은 더 늙어보였다. 깔끔한 회색 정장을 입고 지팡이 없이 선 젠킨스는 미군 헌병에게 길고 사무적인 경례를 했다.

"병장 젠킨스, 보고드립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젠킨스는 탈영과 이적행위(적에게 영어를 가르친 것에 대한)로 30일의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25일을 복역한 후 모범수로 조기출소했다.

그는 관대한 처분을 받는 대가로 북한에 대해 아는 모든 것을 미국에 제공한 것으로 여겨진다.

출소하자 젠킨스는 눈물을 쏟으며 이렇게 말했다. "저는 제 인생에서 커다란 실수를 저질렸습니다. 하지만 제 딸들을 거기서 탈출할 수 있게 한 것은 옳은 일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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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캡션 찰스 젠킨스가 탈영한 지 39년 만에 캠프 자마 미군기지에서 폴 나이가라 중령에게 경례하고 있다

그는 죽을 때까지 북한은 자신의 아이들을 무기로 활용하려 했으며 딸들이 다녔던 엘리트 어학교는 그들을 첩보원으로 육성하고 있었다고 굳게 믿었다.

소가 히토미는 2004년 고향인 사도 섬으로 두 딸과 남편과 함께 돌아왔다. 젠킨스는 관광공원에서 센베 과자와 사진을 찍어주는 일을 했다. 히토미는 지역의 요양원에서 일했다. 젠킨스는 성인이 된 딸들에게 절대 일본 교통경찰이 오더라도 차를 세우지 마라고 말했다. 북한 첩보원일지 모른다는 불안감에서였다.

병장 찰스 젠킨스는 북한의 포로로 지내면서 맹장과 고환 하나, 그리고 39년을 잃었다. 자신의 팔뚝에 있던 미 육군 문신은 마취도 없이 지워졌다.

그는 소가 히토미가 자신의 삶을 구했다고 말했다. 히토미가 젠킨스로 하여금 자유인으로 생을 마감할 수 있게 해준 이유였다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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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캡션 일본으로 귀환한 지 2년이 지난 2004년 7월 자카르타 공항에서 남편과 재회한 소가 히토미가 감격하여 입을 맞추고 있다

다른 탈영병들은 누구와 결혼했나?

  • 아노차 판조이라는 젊은 태국 여성은 1978년 북한 당국에 의해 래리 앱셔과 결혼했다. 그는 사라졌을 당시 마카오에 있는 목욕탕에서 일했다. 둘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고 앱셔가 심장마비로 40세에 사망하고 나서 혼자가 됐다. 당시 이웃이었던 젠킨스에 따르면 당국에 의해 다른 곳으로 이주한 후 외국에서 북한 첩자로 일한 독일인과 재혼했다고 한다.
  • 레바논 출신의 시함 시라이테는 제리 패리쉬 사이에 세 명의 아들을 가졌다. 젠킨스에 따르면 베이루트의 비서 학교에서 다른 세 여성과 함께 납치당했다 한다. 1979년 그들의 부모가 딸들을 구하기 위해 협상 끝에 다시 데려왔을 때 시함이 임신한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아이를 낳기 위해 북한으로 돌아갔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 제임스 드레스녹에게 북한에서의 강제 결혼은 재혼이었다. 그가 미국에서 결혼했던 부인은 그가 탈영한 지 1년이 지난 1963년 이혼했다. 북한 정권은 그에게 루마니아 출신의 도이나 붐베아를 짝지워 줬고 둘 사이에는 두 명의 아들이 태어났다. 젠킨스는 그가 이탈리아의 미술학교에 다니고 있다가 납치됐다고 기술했다. 그는 알려지기로 1997년 폐암으로 사망했는데 드레스녹은 이후 토고 외교관과 북한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딸과 결혼했으며 세 번째 아들을 얻었다.

드레스녹의 세 아들과 셋째 부인은 2006년 영국 다큐멘터리 '푸른 눈의 평양 시민'에 등장했다. 시함 쉬라이테도 등장했는데 그는 결코 자신이 납치당하지 않았으며 자신이 원해서 자신의 아이들과 함께 북한에 남았다고 주장했다. 그가 위협을 받은 상태에서 말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외국인에게 김씨 정권에 대한 비판은 분명 위험했을 것이다.

북한에 살고 있는 마지막 미군 군인인 드레스녹은 2016년 말 74세를 일기로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온 것을 한번도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다큐멘터리에서 그는 이렇게 선언했다. "저는 무엇과도 지금의 삶을 바꾸지 않을 거에요."

찰스 드레스녹은 1960년대에 월북한 미군 중 북한 바깥 땅을 밟을 수 있었던 유일한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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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캡션 65세의 젠킨스가 91세의 어머니 패티 캐스퍼와 고향 노스캐롤라이나에서 재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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