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전쟁: '성폭행범 군복을 봤어요. 한국의 백마부대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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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는 베트남 등지에 남아있는 800여 명의 한국군 성폭행 피해 주장 여성 중 하나다

스물네 살 쩐 티 나이는 베트남 작은 산골 마을의 간호사였다. 동네 사람들이 아이를 낳으면 산파 역할을 하기도 했다.

전쟁이 한창이던 1960년대 말 어느 날, 혼자 집에 머무르고 있던 그에게 누군가 찾아왔다. 한국 군인이었다. 소금을 구하러 왔다고 했다.

며칠 뒤 이 군인은 다시 찾아왔다. "급한 산모가 있어 빨리 나가야 한다"고 하자 군인은 갑자기 나이의 손목을 낚아챘다.

나이는 그렇게 집 안으로 끌려 들어가 성폭행을 당했다.

이제는 일흔이 훨씬 넘은 나이는 지금도 한 가지를 뚜렷하게 기억한다.

"그의 군복을 봤어요. 한국군 백마부대의 상징이 달려 있었어요."

나이는 "한국군 세 명에게 성폭행을 당해 총 세 명의 아이를 낳았다"고 주장했다.

영국 시민단체 '라이따이한에게 정의를(Justice for Lai Dai Han, JLDH)'에 따르면 베트남 등지엔 나이처럼 한국군 성폭행 피해를 주장하는 베트남 여성 800여 명이 생존해 있다.

JLDH는 한국군 성폭행 피해자 및 라이따이한들의 실상을 알리는 활동을 해 왔다.

한국, 베트남전에 32만 명 파병

라이따이한(Lai Đại Hàn)은 20세기 중반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인 남성과 현지 베트남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이들을 말한다. 숫자는 5000명에서 1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베트남어로 '라이'는 잡종을 일컫는 경멸적 단어다. '따이한'은 대한민국의 '대한'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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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캡션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은 10년에 걸쳐 32만 명을 파병했다

베트남 전쟁은 1955년 베트남 민주공화국(북베트남)과 베트남 공화국(남베트남) 간 갈등으로 시작됐다.

1964년 북베트남 해군이 미 해군 구축함을 공격한 이른바 '통킹만 사건'으로 미국의 개입이 본격화됐다.

같은 해, 한국도 베트남에 군대를 보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강력한 반공주의를 내세우며 남베트남을 지지했다.

한국 국방부에 따르면 파병을 시작한 1964년부터 1차 철군을 마무리한 1972년까지, 한국군의 베트남전 총 파병 인원은 32만 명을 훌쩍 넘었다.

사업차 진출한 민간인까지 합하면 이 시기 남베트남에 머무르던 한국인 수는 훨씬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는 사이 남베트남에선 한-베트남 혼혈아가 계속해서 태어났다. 라이따이한으로 불리는 이들 중 상당수가 매춘과 성폭행, 불륜 등을 통해 출생했다.

베트남 정부가 발간한 전쟁 보고서와 정부 공문 등 각종 문헌에는 "한국군이 현지 여성을 성폭행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1969년 베트남 닌투언(Ninh Thuan)성 의회 의원들이 당시 수상에게 보낸 공문엔 "한국군이 어린 소녀 두 명을 강간한 사건을 조사해야 하니 한국과의 합동 수사단을 꾸려 달라"는 내용이 있다.

베트남 여성과 한국인 남성이 정상적으로 가정을 이뤄 라이따이한을 낳은 경우도 있다.

'적군의 핏줄'

1975년 봄, 전쟁은 북베트남의 승리로 끝났다. 남베트남 정권은 무너졌고 그 자리엔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섰다.

'적군의 핏줄'이었던 라이따이한들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라이따이한 쩐 다이 낫(한국명 김상일)은 정권 붕괴와 함께 베트남 사회의 분위기가 급변한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전쟁이 끝난 뒤 어느 날, 동네를 거닐고 있는데 누군가 갑자기 다가와 저를 때렸어요. 기절했다 깨어났을 때 어머니는 '조용히 있으라'고 했죠."

이미지 캡션 낫은 '라이따이한'으로 살아온 인생이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당시 낫은 다섯 살이었다고 했다. 이후 "이웃과 친구들에게 '개의 자식' 등으로 불리며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했다"고 말했다.

그는 "많은 라이따이한들이 차별 속에서 가난과 폭력 등에 시달렸고 상당수가 학교에 가지 못해 문맹이 됐다"고 설명했다.

낫은 또 "전후 많은 베트남인들이 '전쟁 피해자'로 인식됐던 반면, 라이따이한에 대해선 지역 당국 관계자들조차도 '쓰레기'로 여겼다"고 주장했다.

'한국군 전쟁범죄' 2000년대 들어 주목

베트남과의 과거사 문제가 한국에서도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한 건 2000년대에 들어서다.

1990년대 10여 건에 불과했던 한국 언론의 관련 보도는 2000년 한 해에만 40여 건으로 급증했다. 베트남 현지에서 전쟁 범죄 생존자들의 증언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 시기와 겹친다.

이 시기 쏟아진 보도와 학술 연구들은 민간인 학살과 강간, 약탈 등 한국군의 전쟁범죄 의혹을 광범위하게 다뤘다.

1999년 말부터 2000년대까지 이같은 내용을 연속 보도한 한겨레는 민간인 학살 과정에서 여성들을 상대로 성폭행이 자주 벌어졌다는 전직 베트남전 파병 군인의 증언을 싣기도 했다.

현재는 한국군 성폭행 피해자와 그 사이에서 태어난 일부 라이따이한을 전쟁범죄 문제와 분리할 수 없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대부분의 베트남전 참전 퇴역 군인들은 전쟁범죄 의혹을 꾸준히 반박해 왔다.

'과거사' 구체적 언급 않는 양국 정부

역대 한국 대통령 중에선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이 한국과 베트남의 과거사를 언급하며 유감을 표명했다.

특히 김대중 전 대통령은 2001년 한국을 찾은 당시 베트남 쩐 득 르엉 국가주석에게 "'불행한 전쟁'에 참여해 본의 아니게 베트남 국민들에게 고통을 준 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하고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세 대통령 모두 "구체적 사건에 대한 명확한 사과의 단어를 쓰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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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캡션 지난해 3월 베트남을 찾은 문재인 대통령이 쩐 다이 꽝 주석과 환영 행사장에 들어서고 있다

지난해 3월 한국 문재인 대통령이 베트남 순방길에 올랐을 때도 문 대통령의 입에서 구체적인 사과의 말이 나올지 관심이 쏠렸다.

문 대통령은 베트남 쩐 다이 꽝 국가주석과의 만찬에서 "양국 간 불행한 역사에 유감의 뜻을 표한다"고 했다.

당시 한 청와대 관계자는 기자들과의 브리핑에서 베트남 정부가 사과를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먼저 나설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베트남 정부는 과거사에 대해 특별히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있다.

영국 잭 스트로우 전 외무장관은 BBC 코리아에 "자국군을 보호해야 하는 한국 정부의 입장은 이해하지만, 그냥 묻어두는 것은 보호를 위한 최선의 방법이 아닐 것"이라며 한국 정부를 향해 "더 오랫동안 문제를 내버려 둘 경우, 더 큰 곤란만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스트로우 전 장관은 JLDH의 국제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그는 여러 차례 베트남을 오가며 라이따이한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했다.

북미회담 장소 선정되며 과거사 '재조명'

베트남 꽝응아이(Quang Ngai)성의 한 마을엔 한국군의 전쟁 범죄를 기록한 비석이 세워져 있다.

누렇게 바랜 벽에 붉은 색으로 촘촘히 새겨진 비문은 '끔찍한 죄악을 우리는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한국에서 '한국군 증오비'로 불리는 이같은 비석은 베트남 내 수십여 곳에 세워졌다.

나이와 낫, 스트로우 전 장관은 지난 1월 영국 런던에서 열린 '분쟁 지역의 성폭력 예방' 행사에 함께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나이는 한국 정부가 한국군의 성범죄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기사는 1월 19일 처음 발행되었으며 내용 중 일부분이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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