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버풀 거리의 노예와 노예제 폐지론자

1700년 무렵부터 1820년 사이, 도시의 많은 거물들은 노예 무역에 관여했다 Image copyright LSM
이미지 캡션 1700년 무렵부터 1820년 사이, 도시의 많은 거물들은 노예 무역에 관여했다

1700년 무렵부터 1820년 사이, 도시의 많은 거물들은 노예 무역에 관여했다. 각자의 정치적인 혹은 개인적이거나 사회적인 포부를 위해 영국과 아프리카, 카리브해 사이에서 상품과 노예를 거래하는 '삼각 무역'을 이용한 것이다.

당시 대도시의 시장들 중 노예 소유주 또는 노예 상인인 이는 최소 25명이었다. 그리고 이들 중 많은 이들은 탈튼, 쿤리프, 길다트 등 거리명에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

이러한 "불편한 사실" 때문에 조 앤더슨 현 리버풀 시장은 노예 무역과 관련된 거리명에 "정직한 설명"을 적은 명판을 붙이자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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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캡션 노예주 제임스 페니의 이름을 딴 거리 페니 레인

리버풀의 국제 노예 박물관 소장인 리차드 벤자민 박사는 거리 이름을 "완전히 바꾸는" 것을 선호하지만, "이 제안도 환영한다"고 말했다.

그는 "도시를 대표했으면 하는 이들의 이름으로 거리명을 아예 바꾸는 것이 좋은 것 같다"고 했다.

"그렇긴 해도, 거리명에 설명을 붙이자는 주장 또한 이해가 갑니다."

"오늘날 아주 보헤미안적인 볼드 스트리트는 노예 상인이었던 조나스 볼드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만약 그 이름을 가진 주요 도로가 있다면, 그런 이야기가 쓰여질 것입니다."

볼드 스트리트는 가장 두드러진 사례중 하나다. 그런데 많은 도로들이 노예 소유주, 운송업자, 노예 상인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반면 노예 무역에 맞서 싸운 이들을 기념하는 도로명은 몇 개뿐이다.

토마스 스트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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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캡션 토마스 존슨 경

오늘날 리버풀의 근간을 만들었다고 알려진 토마스 존슨 경은 리버풀에서 출항한 최초의 노예 선박 한 척의 소유권 일부를 가지고 있었다.

1664년 리버풀에서 태어난 토마스 경은 아버지의 재산을 등에 업고 출세를 했다. 1700년대 초 리버풀의 대표로 의회에 입성했다. 노예뿐만 아니라 설탕과 담배 무역에 참여했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왕실에 리버풀을 각인시키고 리버풀 부두 건설을 추진했다.

부두는 리버풀의 무역을 크게 부흥시켰다. 하지만 토마스 경은 1720년대 남해포말사건으로 재산을 잃고, 적은 연금으로 만년의 생계를 이어가야 했다.

글래드스톤 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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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캡션 존 글래드스톤 경과 윌리엄 글래드스톤

존 글래드스톤 경은 1786년 리버풀로 이주했다. 북아메리카 및 카리브해와 교역을 해서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그의 재산은 이후 30년동안 430만파운드에서 5100만파운드로 늘어났다.

이 재산 덕에 이튼에서 교육을 받은 아들 윌리엄은 훗날 총리 자리에 올랐다. 임기도 네 차례나 지켰다.

윌리엄은 하원에서 진행한 최초 연설을 통해 아버지의 이익을 옹호했다. 노예제 폐지를 반대한다는 주장을 펼친 것이다. 연설은 실패했지만, 재산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1830년대 노예제가 폐지되었을 때, 글래드스톤은 풀어준 노예에 대한 보상으로 9만 파운드를 받았다. 오늘날로 치면 약 950만 파운드다.

2017년 이 가족의 이름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리버풀 대학 내 건물에서 글래드스톤의 이름을 삭제하자고 학생들이 캠페인을 벌인 것이다.

파 스트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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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파는 자신의 이름을 딴 거대한 노예선의 소유자였다. 그가 살던 집은 아직도 파 스트리트와 콜킷 스트리트 모퉁이에 남아 있다.

700개의 노예용 침상을 갖춘 노예 수송선 '파'는 1798년 아프리카 서부 해안에서 폭발한 것으로 알려졌다. 노예와 바꾸기 위해 화약을 운반하고 있었다는 증거다.

집 뒤에는 창고도 남아 있다. 현재 2급 유적지인 이곳에선 철제품을 보관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역시 노예 수송선 '파'로 아프리카로 운송돼 노예와 맞바꾸던 것들이다.

재산을 모은 파는 세기가 전환될 무렵 리버풀에서 슈롭셔의 리쓰우드 홀로 이주했다. 그리고 1840년 그곳에서 찰스 다윈을 만났다. 다윈은 훗날 파를 "늙고 구두쇠 같은 지주"라고 묘사했다.

로스코 스트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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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캡션 윌리엄 로스코, 1815-1817

토마스 파의 이주 후 그가 살던 집을 지역 사회에 제공됐다. 1822년 이 집은 "문학, 과학, 예술의 진흥"을 위해 설립된 리버풀 왕립 연구소의 거점이 됐다.

이 연구소와 관련된 이들 중 상당수는 노예 상인이거나 노예 소유주들이었다. 하지만 이 단체는 변호사, 작가, 미술품 수집가, 은행가, 식물학자, 시인, 정치인이기도 한 노예제 폐지론자 윌리엄 로스코가 이끌었다.

로스코는 1806년 하원의원으로 선출된 후, 영국의 노예 무역을 금지하려는 윌리엄 윌버포스를 지지했다.

이로 인한 대가도 있었다. 그가 리버풀로 돌아왔을 때 노예제를 찬성하는 이들로부터 위협을 받았다. 그리고 관련된 시비로 자신의 지지자가 살해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그의 이름은 로스코 레인과 로스코 가든에 붙여졌다.

얼 스트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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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캡션 존 얼, 윌리엄 얼, 토마스 얼, 하드먼 얼

얼 가문의 성장과 부는 노예제와 불가분의 관계다. 몇 세대에 걸쳐 소위 '인간 화물'이라는 노예 매매와 소유에 관여했기 때문이

존 얼은 이 가문의 성장을 주도한 인물이다. 1700년대 초 막내 윌리엄과 함께 노예선을 운행하며 다른 노예 선박에도 지분을 가지고 있었다. 이 부자는 노예와 함께 담배, 설탕, 철제품을 거래했다.

이후 이 일은 자식들이 물려받았다. 이 가문은 수십년에 걸쳐 노예제를 이용한 산업과 플랜테이션 농업으로 부를 축적했다. 이 재력으로 윌리엄의 아들 토마스는 '스페클랜드 하우스'를 지었고, 이곳에서 가까운 도로가 얼 로드가 됐다. 손자 하드먼 얼 경은 뉴턴르윌로스 근처에 새로 만들어진 얼스톤 정착지에 자신의 이름을 제공했다.

출처: 역사적인 영국, 리버풀의 국제 노예 박물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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